일본 기업들이 지난 10년간 적극적으로 해외에 진출한 결과 환율시장에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주요국 통화에 대한 엔화 가치를 나타내는 실질실효환율이 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엔화의 구매력이 50년 전 수준으로 후퇴했다.
20일 국제결제은행(BIS)과 일본은행에 따르면 지난 1월 엔화의 실질실효환율은 67.55에 그쳤다. 1972년 6월(67.49) 후 50년 만의 최저치다. 1972년 달러당 엔화는 308엔, 일반 근로자들의 월급은 10만엔대로 현재 엔화 가치와 평균소득 모두 당시의 3배에 달한다. 그럼에도 1월의 실질실효환율은 현재 엔화의 구매력이 1972년 수준임을 나타낸다. 1995년 150을 넘었던 수치가 27년 만에 반 토막 났다.
60개 주요 통화 가운데 중국 위안화가 131.01로 가장 높고 미국 달러(119.75)와 영국 파운드(105.15)도 100을 넘는다. 한국 원화는 103.28로 19번째다. 엔화보다 실질실효환율이 낮은 통화는 아르헨티나 페소와 콜롬비아 페소, 브라질 헤알, 터키 리라 등 4개뿐이다.
엔화의 실질실효환율이 추락한 것은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의 장기 침체에 빠지면서 물가가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3년 집권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인위적으로 엔화 가치를 떨어뜨리는 ‘아베노믹스’를 추진하면서 하락세에 가속도가 붙었다.
최근엔 일본 기업의 생산시설 해외 이전(오프쇼어링) 등 적극적인 해외 진출이 엔화의 위상 추락을 부추긴다는 분석이 나온다. 해외 법인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은 무역수지가 아니라 제1차 소득수지(해외 법인과 해외 자산을 통해 벌어들인 배당과 이자소득)에 반영된다.
무역수지에 반영되던 흑자가 1차 소득수지로 옮겨가면서 ‘엔저(低)’를 차단할 엔화 매수세가 사라졌다는 설명이다. 과거 일본 기업들은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를 팔고 엔화를 샀다. 바클레이즈증권은 “최근 일본 기업들은 해외에서 벌어들인 수익 대부분을 현지에 재투자한다”고 전했다.
해외 시장의 비중이 높아지자 일본의 경상수지 구성도 크게 바뀌었다. 2010년까지는 제1차 소득수지와 무역수지가 고르게 흑자를 냈다. 기업들이 해외로 나간 2010년 이후 제1차 소득수지 흑자만 커졌다. 2009년 12조9868억엔이던 1차 소득수지 흑자는 2021년 20조3811억엔으로 55.8% 늘었다. 2020년엔 일본의 1차 소득수지가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반면 무역수지는 흑자와 적자를 반복했다. 작년 8월부터는 6개월 연속 무역적자가 이어졌다. 지난달 무역수지는 2조1910억엔 적자로 역대 두 번째 규모였다.
원유 등 원자재 가격 급등의 영향으로 수입 규모가 사상 최대인 8조5000억엔에 달했다. 반면 일본의 주력 수출품인 자동차 수출이 1% 감소하는 등 수출은 둔화세가 뚜렷했다. 생산시설의 해외 이전으로 수출 규모가 줄어들자 원자재 가격 상승의 충격이 고스란히 무역수지 적자에 반영되는 구조다. 우에노 다이사쿠 미쓰비시UFJ모건스탠리증권 수석외환전략가는 “국제 원자재 가격 급등은 비자원국 통화인 엔화의 매도세 증가로 이어진다”며 “해외 공장을 일본으로 되돌리거나 원자재 자급률을 개선하는 것 외에 해결책은 없다”고 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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