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죄를 지어도 등급이 있다. 상해죄, 강도상해죄, 특수상해죄가 있고, 과실상해죄, 중과실상해죄가 있다. 타인의 생명을 앗는 범죄도 의도 여부나 책임의 정도에 따라 가중되거나 감형되니 일종의 등급이 있는 것이다. 미국을 봐도 1급 살인죄. 2급 살인죄가 있다.
도둑, 강도질에도 등급이 나뉠 것이다. 가장 심한 도둑은 무엇일까. 세금 도둑 아닐까. 최악의 ‘1급 상(上)도둑’은 세금 강탈, 특히 공무원과 그 주변의 혈세 도둑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 범죄가 가장 질이 나쁘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피해자가 가장 많고, 서민 지원 몫의 공적 자금을 개인 착복했다는 데서 ‘기회의 절취’이기도 한데다, 공공선을 지향해야 할 권력으로 은닉 은폐가 비교적 용이하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이 문제의 핵심은 유용 금액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초밥이 10인분인지 그 이상인지, 그것이 과연 어디로 갔느냐는 야당의 공세도 본질은 아니다. 처음의 사실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물론 법의 심판대에 오른다면, 개인카드와 경기도 법인카드를 돌려쓰며 시간대와 한도를 넘나든 의혹이나 이른바 쪼개기 등에 대한 사실관계도 정확하게 가려질 것이다.
세계 최연소(35세) 총리여서 더 주목을 끌었던 오스트리아의 제바스티안 구르츠가 최근 물러난 데에도 공금유용 문제가 있었다. 물론 그는 여론 조작과 위증 의혹까지 받았지만, 서구 국가에서 공금 유용은 아주 중대한 범죄다. 말이 유용이지, 도둑질 아닌가.
연맹의 질의에 노르웨이 총리실은 “총리가 예산을 사용하고 영수증을 첨부하지 않으면 사임 또는 탄핵될 것”이라고 응답했다. 캐나다 총리실은 “비밀스런 예산은 정부 지출의 투명성과 신뢰성이 직결되는 문제로 비밀 예산을 금지하고 있다”며 “총리를 비롯한 각 장관은 영수증을 포함한 예산지출 내역을 공개하고 있다”고 회신해왔다. 캐나다는 내각책임제로, 총리는 국가 수반이다. 프랑스는 2002년 올랑드 정부 때 비밀예산이 폐지된 이래 지금은 존재하지 않고, 국가안보총국 같은 정보 부서에만 일부 존재한다고 한다.
납세자연맹 조사에 주목하는 것은 세금관련 독립 시민단체인 이곳이 청와대의 특수활동비 공개를 소송으로 이끌어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울행정법원은 대통령 비서실장 대상 특활비 정보공개 소송에서 납세자연맹 손을 들어줬다. 공개대상은 문재인 대통령의 특활비 지출 내역, 부인 김정숙씨의 의상·엑세서리 구매 내역, 2018년 1월30일 청와대 행사의 도시락 가격 등이다. 법원의 공개 판결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이처럼 논점이 간단하고 단순한 문제제기를 3년 8개월만에야, 그것도 정부 임기가 끝날 시점에야 결론이 나왔다는 사실을 보면 아직 우리 사회가 갈 길은 멀어 보인다.
“정부 기관에서 개인적으로 공금을 쓰는 일이 근절돼야 한다”라는 김 회장의 주장은 세금 도둑, 공금 강탈을 막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세금의 지출과 공금의 사용에 관한한, 사실 선진국이라는 것도 거창한 것도 아니다.
그 연장에서 납세자연맹은 청와대 특활비 정보 공개를 촉구하는 국민서명운동을 시작했다. 21일 발표한 입장문에서 납세자연맹은 “조직의 특활비는 국가안보와 관련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법원으로부터 판결문이 17일 송달됨에 따라 청와대는 이로부터 14일인 다음달 3일까지 항소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면서 “만일 청와대가 항소한다면 대통령 임기가 끝나 청와대 문서는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되고, 법원이 청와대에 서류가 존재하지 않음을 이유로 원고의 소송을 각하할 가능성이 높다”고 이유를 내세웠다. 서명운동이 마무리 되면 납세자들의 특활비 전면공개에 대한 의견을 모아 다시 청와대에 전달할 예정이다. 김 회장은“박근혜 정부처럼, 법원의 특활비 공개 판결에 항소하지 말고 특활비 내역 일체를 공개함으로써 검찰 등 다른 모든 국가기관도 특활비를 공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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