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키예프와 얄타

입력 2022-02-21 17:19   수정 2022-02-22 00:08

‘울부짖으며 신음하는 넓은 드네프르 강이여!/ 성난 바람 불어와 버들가지 땅으로 휘감고/ 집채만 한 파도 들어 올리는구나.’ 우크라이나 국민시인 타라스 셰브첸코(1814~1861)의 시 ‘광인’ 첫 부분이다. 이 시에 나오는 드네프르 강 덕분에 수도 키예프에는 녹지가 많다. 그래서 ‘푸른 도시’로 불린다.

키예프의 역사는 9세기 키예프공국 때부터만 잡아도 1200년에 이른다. 흑해와 발트해를 연결하는 무역으로 12세기에는 인구가 10만 명이 넘을 정도로 번성했다. 이곳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벨라루스 등 동슬라브 3국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13세기부터 암흑의 시기를 보냈다. 몽골 침략으로 도시가 완전히 파괴됐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등의 지배를 받았다. 17세기 로마노프 왕조에 편입된 뒤로는 300년간 러시아의 속박을 받았다. 스탈린 시대엔 가혹한 수탈로 엄청난 인구가 굶어죽었다.

1991년 소련 붕괴로 독립한 뒤에는 2004년과 2014년의 시민혁명을 거쳐 ‘반(反)러시아 친서방’ 중심 도시로 자리를 잡았다. 러시아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도 추진했다. 그러나 이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러시아의 위협으로 결국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됐다.

키예프가 ‘반러·친서방’의 중심 도시라면 우크라이나 동남부의 크림반도에 있는 항구도시 세바스토폴과 얄타는 ‘친러·반서방’ 성향의 도시다. 얄타는 고즈넉한 휴양도시이지만, 이곳도 온갖 풍상을 다 겪었다. 1475년 오스만 제국에 점령됐고, 1783년엔 러시아 제국에 합병됐다. 우크라이나 영토로 바뀐 지 20여 년 만인 2014년 러시아의 크림 합병으로 다시 남의 땅이 됐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에 2년 이상 점령되기도 했다. 1945년 연합국의 ‘빅3’인 미국·소련·영국이 ‘얄타회담’을 연 장소도 이곳이다. 이 회담은 일제 패망 후 한반도가 38선으로 분단되는 계기가 됐으니 우리와도 관련이 깊다.

두 도시 모두 유서 깊고 아름답지만, 강대국들의 ‘거대한 체스판’ 위에 놓인 운명이 됐다. 시인 셰브첸코가 ‘그대들의 자유를 굳게 지키라’(시 ‘유언’)고 외치던 목소리는 러시아군의 폭격 훈련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그의 이름을 딴 키예프의 타라스 셰브첸코 국립대학에는 2019년 세워진 우리나라 국민시인 김소월의 흉상도 있는데….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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