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은 '실패의 경험'도 팔아야"…벤처캐피털 터줏대감의 조언[실리콘밸리 나우]

입력 2022-02-23 00:16   수정 2022-02-23 13:40


실리콘밸리 한국계 벤처캐피털(VC) 터줏대감으로 불리는 김범수 트랜스링크인베스트먼트 매니징 파트너와 글로벌 협업툴 시장의 떠오르는 강자 이주환 스윗(Swit) 대표 등이 21일(현지시간) 미국 실리콘밸리 서니베일의 한 호텔에서 스타트업 창업자들 대상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주제는 '글로벌 진출을 위한 성장 전략'.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을 돕는 롯데그룹의 '글로벌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의 일환입니다. 실리콘밸리의 미디어 스타트업 '더 밀크'와 한국인 창업가 모임 '82스타트업'이 함께 기획했다고 합니다.

이날 행사엔 라이트브라더스, VESSL AI, 지니얼로지, Stratio, 콘텐츠홀딩스, 마린이노베이션, 로플리, EverEx, 윌로그 등 9개 스타트업의 임직원들이 참석해 스타트업 업계 선배들의 현실적인 조언을 들었습니다. 미국 진출을 원하는 스타트업 관계자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내용을 자세히 정리했습니다.
"스타트업 창업자, 질문으로 강연 한 번 끊어주는 '배짱' 필요"
'성장하는 피칭/시리즈 B,C로의 성장전략'을 주제로 마이크를 잡은 김범수 파트너는 "질문이 있으면 언제든지 강연 도중에라도 이야기를 하라"며 스타트업 창업자의 주요 덕목으로 '적극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미국에 진출하고 싶으면 '나를 인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질문을 해서 강연을 한 번 끊어줄 수 있는 배짱이 필요하다"고 말해 강연 초반의 어색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김 파트너는 미국에서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실무 노하우, 그중에서도 '시리즈 A' 같은 자금조달 초기 단계의 자금 유치 노하우를 소개했습니다. 자금조달 단계를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로 비유한 김 파트너는 시리즈 A를 중학교 시절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실적과 성장성 등에 대해 본격적으로 시장의 평가가 내려지는 관문이라는 겁니다. 김 파트너는 "부모(투자자)들의 믿음보다 성적표(실적)가 중요해지면서, 학생(스타트업)의 꿈과 부모의 현실적 판단이 충돌하는 애매한 시점"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스타트업에도, 될성 부른 떡잎을 찾아야하는 벤처캐피털 입장에서도 시리즈 A 단계는 '까다로운 시점'이란 게 김 파트너의 설명입니다. 그는 시리즈 A 단계의 자금 조달을 준비하는 스타트업 창업자들에게 "자신에게 객관적일 것"을 주문했습니다. 크게 세 가지를 점검하라고 조언했는데, 첫째는 '반복 가능한 매출 창출 모델이 있는지', 둘째는 '성장 속도는 충분히 빠른지', 셋째는 '지금까지 깨달은 교훈은 무엇인지' 등입니다.
매출 한 번에 크게 뛰는 모습 보여야
반복가능한 매출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 김 파트너는 예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기업용 소프트웨어(SaaS) 업체를 지향하면서 매출의 80~90%가 대기업 SI에서 나오는 스타트업에 대해선 '반복 가능한 매출이 없는 회사'라고 평가했습니다. 실적이 대기업에 좌우되기 때문에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최근엔 환자, 병원, 보험사 중에 누가 돈을 낼 지 불분명한 헬스케어 서비스 스타트업들도 눈에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성장속도와 관련해선 '매출이 크게 뛰는 그래프'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스타트업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 때문에, 그 시장의 성장성이 크다면 4~5년 정도는 매출 그래프가 크게 성장해야한다는 게 김 파트너의 설명입니다. 매출이 계속 우상향하지만 증가율이 높지 않다면 VC들은 투자를 망설일 수 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깨달은 교훈을 어필해야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창업자 입장에서 투자자들이 회사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상황에 대해 'B+ 학점을 받은 것'이라고 비유한 김 파트너는 "B+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기 보다는 고등학교(시리즈 B 이후 단계)에 가면 어떻게 'A'가 될 수 있는 지에 대해 피력해야한다"며 "스타트업은 '실패의 경험'이라도 팔아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과거에 무엇을 잘못했는 지 알았기 때문에 반복하지 않을 것이란 스토리라도 써야한다는 얘기입니다.
"구색 갖추기용 해외투자자 모집은 안 하는 게 낫다"
스타트업 중엔 미국 VC로부터 펀딩을 받고 싶어하는 곳들이 종종 있다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김 파트너의 조언입니다. 간단히 말해 미국 VC 입장에서 리스크를 안고 한국 스타트업 같은 해외 기업에 투자해야 할 이유와 명분을 줘야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규모 투자자일수록 증명이 안 된 초기단계보다는 좀 더 비싼 가격에 투자하게 되더라도 안정적인 시리즈 B 이후에 투자하는 걸 선호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게 창업자와 해외시장 실적입니다. 한국에선 '이 제품이 미국에 가서도 통한다'고 생각을 할 수 있는데, 미국 투자자들은 물건보다는 '사람'을 본다는 겁니다. 또 '국내 자동차 업체'에 납품한 실적보다는 미국 투자자들이 좀 더 깊숙하게 아는 테슬라, 리비안, GM 같은 곳과 거래한 실적이 있으면 더 좋다고 합니다.

한국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해외 투자자 유치 관련해 자주하는 실수 중 하나가 '한국에서 100억원 모았는데 나머지 50억원은 미국 투자자들로 채우고 싶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곧 미국 투자자들에게 '들러리서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자금조달의 판을 보기 좋게 만드려면 아예 한국에서 다 받든지, 아니면 미국에서 먼저 리드투자자를 찾는 게 편이 낫다는 게 김 파트너의 생각입니다.
"플립(미국으로 본사 이전)이 필수는 아닌데..."
플립에 대해선 "사업의 본질이 아니다"라는 게 김 파트너의 지론입니다. 한국 스타트업 창업자 중에 플립을 '야구선수의 메이저리그 진출'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플립의 장단점을 깊이 있게 고민해야한다는 겁니다. 김 파트너는 "왜 플립이 필요한지, 그리고 팀은 아직 준비가 안됐는데, 창업자의 의욕만 앞선 것이 아닌지 등을 냉정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며 "시장조사와 이해가 필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프리 시리즈 A 단계에서 VC들을 얼마나 자주 만나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김 파트너는 "초기단계에 VC를 자주 만날수록 좋다"고 답했습니다. 좋은 차가 없더라도 연애를 잘 할 수 있는 것처럼 스타트업도 '준비가 안됐다'고 생각하거나 이것 저것 따지지 말고 일단 만나보라는 겁니다. 그렇게 교류를 하다보면 연애(펀딩)가 시작될 거라는 게 김 파트너의 설명입니다.

이와 관련해 VC들의 연락이 왔다고 스타트업이 모든 사업 전략을 공개할 필요는 없다고 합니다. VC의 관심이 곧 투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일부 VC는 자사 사업을 어필해야하는 스타트업의 아쉬운 점을 악용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동종업계 특정 업체의 기술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기 위해 '투자하는 척' 전화를 걸어 정보를 빼갈 수 있다는 겁니다.

와이컴비네이터 등 유명 스타트업 육성기관의 프로그램에 참여해야하는 지에 대한 질문도 나왔습니다. 이에 대해 김 파트너는 "굉장히 초기 단계 업체라면 모르겠지만 30억~50억원 정도 이미 펀딩을 받았다면 굳이 갈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와이컴비네이터 등 유명 스타트업 육성기관은 스타트업의 기업가치를 '보수적'으로 산정하는 경향, 즉 속된 말로 '후려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김 파트너는 "어쩔 수 없이 쓴 약(와이컴비네이터)을 먹어야하는 경우가 있다"면서도 "기업가치를 한국에서보다 저평가 받을 수 있다는 점은 유의해야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 진출 위해선 실리콘밸리로 와야"
미국 현지 마케팅'을 주제로 강연한 이 대표는 '왜 스타트업이 실리콘밸리로 와야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그는 "세계화를 위한 소프트웨어가 탄생한 곳이 실리콘밸리"라며 "세상을 먹어 삼킨 소프트웨어는 다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강조했습니다. 실리콘밸리에 대해선 '글로벌 그 자체'라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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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에서 탄생한 소프트웨어가 세계화에 성공한 비결로 이 대표는 세 가지를 꼽았습니다. 각 국을 대표해서 실리콘밸리에 모인 우수한 인재들의 다양성, 문화적 배경이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뭉쳐 회사를 이끌게 하는 강력하고도 독특한 문화, 마지막으론 땅이 넓은 탓에 열악한 인터넷 인프라(기반시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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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표는 "워낙 사람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강력한 문화가 없이는 이들이 서로 공감하면서 일하도록 하는 게 불가능하다"며 "열악한 인터넷 환경에서도 잘 돌아가도록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야 했다는 점도 실리콘밸리 소프트웨어의 경쟁력"라고 말했습니다.

한국 스타트업이 미국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려면 대표(CEO)가 반드시 실리콘밸리로 와야 한다고도 강조했습니다. CEO, 창업자의 자질에 대해서도 경험을 토대로 현실적인 조언을 이어갔습니다. CEO가 회사의 비전에 대해 철학을 갖고 있어야하며, 이를 직접 고객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한다는 겁니다. 이 대표는 실제 스윗 홈페이지의 제품 설명 등을 직접 작성해 업계에서 '스윗의 홈페이지는 명확하다', '알기쉽다'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그는 "CEO는 회사의 비전과 창업 철학에서 명확한 관점을 갖고 있어야 한다"며 "이를 직접 문서로 작성할 수 있어야 하고, 고객들에게 이를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의 문화와 제품은 서로 긴밀히 연계돼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실리콘밸리=황정수 특파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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