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세계 첫 필기시험' 과거제는 어떻게 나왔나

입력 2022-02-24 17:12   수정 2022-02-25 00:48


과거제도는 동양 사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헝가리 출신 중국학 연구자 에티엔 발라스에 따르면 개방적·객관적인 시험으로 국가를 운영하는 관료를 뽑는 이 획기적인 제도는 ‘영원한 관료제 사회’로 불린 중국을 떠받치는 근간 역할을 1000년 넘게 맡았다. 시험을 준비한 수많은 당사자에겐 ‘지옥’이었다고 일본 동양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명저 《과거, 중국의 시험지옥》에서 묘사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제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누가, 언제, 왜, 어떻게 만들었나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제도 형성사》는 수·당 시대 중국사 전문가가 과거제도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철저한 사료 비판을 통해 재구(再構)한 책이다. 본문만 600쪽 가까운 분량에 옛 제도와 관련한 낯선 용어가 수시로 튀어나오는 탓에 읽기가 수월치는 않다.

과거제도가 언제 시작됐는지는 불분명하다. 한국과 일본 학계에선 수 문제(재위 581~604년) 때 과거가 생겼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반면 중국과 구미에선 수 양제(재위 604~617년) 시기, 구체적으로 수 양제 대업 1년(605년)에 등장했다고 주로 판단한다. 하지만 당대 이후로 등장 시기를 미루는 견해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처럼 의견이 엇갈리는 것은 첫 과거제 시행과 관련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당나라 설등(647~719년)이 692년 올린 상주문에 “수 양제가 진사 등의 과목을 두었다”고 명시했지만, 이는 수 양제 때로부터 100년가량 뒤에 나온 주장일 뿐이다. 후대인 오대십국 시대에도 수 문제 개황(581~600년) 연간이나 당 태종(재위 626~649년) 때 과거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뚜렷한 근거 없이 유포됐다.

과거의 ‘출생’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는 데는 용어가 불명확한 영향도 크다. ‘과거’라는 단어는 당 후기 문헌에서야 나타난다. 송대까지도 한대 이래 사용됐던 ‘공거(貢擧)’로 일컬어졌다. ‘진사(進士)’ ‘빈공(賓貢)’ 등 과거와 연관된 단어들이 시대에 따라 다양한 뜻으로 혼용되면서 혼란은 심화했다.

과거제도가 초기에 분명하게 뿌리내리지 못한 것은 정치 권력의 불안정성과 관계가 깊다.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는 통일을 이뤘다고 해도 아직 제국이 얼마나 지속할지 모르던 시기였다. 필요한 관인(官人)의 확보가 쉽지 않았기에 황제는 천거 등을 통해 각별한 예우를 담아 마치 초빙하듯 관인을 선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역대 황제들은 세력을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 과거에 눈을 돌렸다. 문장지선(文章之選)을 앞세웠던 무측천이 문학적 소양을 갖춘 산동(山東)과 강좌(江左)의 사인을 대거 등용하며 집권 세력의 교체를 도모한 게 대표적이다.

당나라 시기 중앙정부는 국자감과 같은 관학 교육을 통한 관인 양성을 시도했다. 국가 차원의 관인 자격자 양성사업에선 유교 경전을 주로 다루는 명경과(明經科)가 주목받았다. 하지만 필기시험이 강화되면서 점점 문학적 소양이 중요해졌다. 그에 따라 ‘아름다운 문장으로 뽑는 과목’이라고 일컬어지던 진사과(進士科)의 위상이 점점 높아졌다. 공문서에서 변려문의 사용, 황제 측근 문사들의 역할 증대는 이런 경향을 가속했다. 진사과 급제자들의 동류의식까지 강화되면서 당 후기가 되면 진사과가 가장 중시된다.

시대가 흐르면서 과거제도의 확산은 불가역적으로 된다. 고종~예종 시기 2.2명이던 연평균 과거 급제자 수는 당 현종 때는 3.0명으로 늘어났다. 모두가 과거를 중시했다. “빈한한 이들은 급제하지 못하면 굶주리고, 대대로 벼슬하던 이들은 급제하지 못하면 관인 가문이 끊어진다”고 왕정보(王定保)가 《당척언(唐言)》에 기록할 정도였다. 당 후기에는 전쟁 중에도 거의 매년 과거를 시행했다. ‘안사의 난’ 8년 동안 과거를 치르지 않은 때는 762년 한 해에 불과했다.

세계 최초의 필기시험이라는 과거제도는 긴 시간에 걸쳐 조금씩 구체화해 나갔다. 실력주의에 기반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과거제는 선발자인 황제와 피선발자인 문사 사이의 복잡다단한 역학 관계의 산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처럼 ‘우연히’ 형성된 과거제는 발전을 거듭하며 황제와 사인의 행동을 구속했다. 그렇게 계획과 우연이 뒤섞여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진행되는 것이 역사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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