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외교부 당국자의 말이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무력 침공을 억제하고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경제 제재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지지를 보내며 이에 동참해 나갈 것”이라며 처음으로 대(對)러시아 제재 동참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제재 동참 시기와 방식을 묻는 질문엔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답변뿐이었다. 독자 제재도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외교부는 러시아의 전면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이 있기 불과 한 시간 전 “러시아가 어떠한 형태로든 전면전을 감행할 경우 우리 정부로서도 제재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면전’이 어떤 상황을 의미하냐는 질문에는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미국 워싱턴DC 조야에선 한·미 균열의 모습까지 포착되고 있다. 미 상무부는 24일 “미국의 반도체 기술이나 장비를 이용했을 경우 제3국에서 생산했더라도 러시아에 수출할 수 없다”는 대러 제재 방안을 발표했다. 동시에 “이와 비슷한 조치를 이미 적용하고 있거나 적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국가에는 해당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며 32개국의 예외 대상국 명단을 공개했지만 한국은 빠졌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이날 ‘공동 대응’을 강조하며 직접 파트너 국가들을 언급할 때도 한국은 없었다. 발빠르게 미국과 발맞춰 독자 제재 방침을 결정한 영국 프랑스 캐나다 일본 호주 등은 모두 파트너 국가에 포함됐다.
물론 정부는 신북방정책에 많은 공을 들여온 만큼 러시아와의 관계가 신경 쓰일 것이다. 하지만 정부 스스로 이번 사태를 ‘러시아의 일방적인 무력 침공’이라고 이미 규정했다. 26일 기준 우크라이나의 민간인 사망자만 200명에 육박한다. 그런데도 이번 사안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는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주장하며 갈팡질팡하던 때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마크 패츠패트릭 전 미 국무부 부차관보는 같은날 “한국은 과거 침략의 피해자로서 대대적인 원조를 받았고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져도 그런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점에서 수치스럽다”고 말했다. 그의 지적처럼 70여 년 전 한국은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불법 침공에 맞닥뜨렸다. 당시 수교조차 맺지 않은 수많은 나라로부터 수만 명의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았던 국가가 경제 제재조차 마지못해 동참하는 듯한 모습이 훗날 한국에 어떤 부메랑으로 돌아올지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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