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조선업체 한국조선해양이 점점 거세지는 발주국들의 자국산업보호(로컬컨텐츠) 요구에 글로벌 생산 전략을 새로 짜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등 주요 발주국에 만들어지는 대규모 조선소를 견제하기 보단 파트너로 끌어들이고, 기술을 이전해 ‘로열티(사용료)’를 받는 플랫폼 기업으로 성장한다는 전략이다. 국내 기업 유일의 해외 조선소인 베트남 조선소는 저가수주 공세로 한 때 국내 조선산업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갔던 중국을 견제할 전초기지 역할을 맡는다.
IMI조선소는 국내 조선업 역사상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순수 ‘로열티’방식 해외 조선소다. 한국조선해양은 최소 5조원 이상으로 추정되는 이 프로젝트에 기술을 제공하는 ‘라이센서’로 참여해 IMI와 SEMC 지분을 각각 20%, 30%씩 확보했다.
2019년 IMI에 초대형원유운반선(VLCC) 설계 도면과 건조 기술 등을 판매하는 계약을 맺었다. 이 조선소가 VLCC를 만들때마다 로열티를 받는 구조다. IMI는 이미 아람코와 바흐리로부터 50척 이상의 원유운반선 건조 물량을 확보한 상태다.
로열티는 핵심 기자재인 엔진에서도 나온다. SEMC는 한국조선해양이 독자 기술로 개발한 선박용 중형엔진인 ‘힘센엔진’을 로열티를 내고 생산한다. 아직은 만(MAN), 바르질라 등 유럽 업체가 라이센스를 갖고 있는 대형엔진을 포함해 연간 200여대의 선박용 엔진을 생산할 계획이다.
한국조선해양은 자회사 현대중공업을 통해 대형엔진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 상당수를 공급한다. 한국조선해양 관계자는 “힘센엔진을 해외에서 생산하는 것도, 국내 업체가 엔진 부품을 수출하는 것도 처음”이라며 “과거 생산비를 줄이기 위해 이뤄졌던 해외 확장과는 차별화되는 기술 수출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사우디에 앞서 한국조선해양은 러시아 정부가 자국 조선업 강화를 위해 추진 중인 즈베즈다 조선소 현대화 사업에 관여하며 기술 수출을 물꼬를 텄다. 현대삼호중공업은 지난 2017년 엔지니어링 합작사 즈베즈다-현대를 설립하고, 즈베즈다와 함께 중형급인 아프라막스급 유조선을 건조해 지난해 인도까지 성공했다. 한국과 가까운 러시아의 경우 80%이상의 핵심 공정을 국내에서 수행한뒤 최종 건조 작업을 러시아에서 맡았다. 주요 원유, 천연가스 생산국인 러시아는 군함 건조 기술은 뛰어나지만 상선 분야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기술을 전수하는 대신 수주를 확보하는 전략이다.
현대미포조선 자회사 현대베트남조선은 기술 수출을 통해 간접적인 수익원을 확보하는 사우디, 러시아와 달리 경쟁업체를 견제하기 위한 ‘전략 무기’다. 1996년 베트남 국영조선공사와 합작으로 설립된 현대베트남조선은 2011년 선박 건조용 조선소로 전환했다. 현대베트남조선은 국내 조선소에선 비용 문제로 수익성이 떨어지는 중형 원유운반선과 벌크선을 집중 건조한다. 한국 조선소들의 최대 경쟁자인 중국 조선소들의 주력 선종들이다. 한국조선해양 관계자는 “비주력 선종에서의 경쟁 구도가 만들어져야 주력인 LNG선이나 대형 컨테이너선 분야에서도 중국 조선소들의 저가 수주 여력이 줄어든다”로 설명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사우디, 러시아는 직접 대규모 조선소 구축에 나서며 더 이상 선박 건조를 100% ‘아웃소싱’에 맡기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들 국가들은 과거 중국, 동남아에서 벌어진 조선소들의 실패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진출 전략을 고도화시켰다. 발주력을 바탕으로 한국조선해양 등 글로벌 조선업체들로부터 기술을 이전 받고, 로컬컨텐츠 조건을 자국의 제조업 역량 강화에 활용하는 식이다.
신흥국들의 조선업 실패 원인이었던 기자재 인프라 확충에도 전력을 다하고 있다. 사우디 정부는 최근 약 1조원을 들여 킹살만 단지에 두산중공업 주단조 공장을 유치했다. 중국 조선업체에도 기자재 인프라 구축을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앞으로 발주를 받고 싶으면 자신들의 제조업 육성에 기여하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로열티를 기반으로 한 한국조선해양의 글로벌 전략은 이 같은 배경에서 나왔다. 대형 LNG운반선, 이중연료추진선 등 현재 압도적인 우위를 가진 친환경 차세대 선박 분야는 기술개발(R&D)를 통해 중국, 일본 등 경쟁국 기업과 ‘초격차’를 유지하고, 국내선 경쟁력이 떨어지는 비주력 선종은 신흥국에 대한 기술 수출을 통해 수익을 확보하고 경쟁업체를 견제하는 식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기술 우위 유지가 전략 성공의 전제조건”이라며 “보다 수주 환경이 복잡해지면서 한국 조선업체들의 글로벌 전략도 고도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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