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3·1절 기념사를 보면 긴박한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3·1 독립운동 정신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강대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휘둘리지 않고 우리 역사를 우리가 주도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라고 한 것부터 그렇다. 원론적으로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미·러, 미·중 대립이 첨예한 상황에서 굳이 이런 말을 꺼낸 것은 자칫 어느 편에도 서지 않겠다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은 대러시아 제재에 미적대다 미국의 대러 수출 통제조치 면제 대상에서 제외돼 기업들이 타격을 입게 됐다. 더욱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핵무기 위협까지 하고 있고, 무차별 포격으로 어린이 등 민간인 희생까지 갈수록 늘어나는 판이다. 오로지 힘에 의지해 민간인까지 짓밟는 전범(戰犯) 행위 앞에서 방관자처럼 기계적 중립을 취하는 게 균형외교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가 “국제관계가 ‘힘이 정의다’라는 개념에 기초한다면 세계는 싱가포르 같은 소국들에는 위험한 곳이 될 것”이라며 러시아를 강력 규탄한 것과, 일본이 1억달러 차관에 더해 우크라이나에 1억달러를 긴급 지원하기로 한 배경을 돌아봐야 한다. 세계 10위 경제대국이란 한국이 고작 1000만달러 규모의 인도적 지원에 그친 것과 대비된다. 하필이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한 날 김부겸 총리가 남·북·러 가스관 연결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것도 부적절하기 짝이 없다. 혹자는 무역 의존도가 높아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외교에 원칙도 없고 양쪽 눈치만 보며 국제사회 지원에도 인색한 나라라는 이미지가 굳어진다면 더 큰 손실을 초래할 것이다.
문 대통령은 “누구도 대한민국을 흔들 수 없다”고 또 자랑했다. 그러나 외교는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이 정부 들어 ‘사드 3불(不)’ 등 친중 정책을 폈지만 돌아온 것은 대통령의 ‘혼밥’ 등 온갖 굴욕이었고, 지난 5년간 반일 선동외교는 양국관계를 파탄으로 몰았으며, 한·미 동맹은 균열이 더 커졌다. 이런 식의 눈치 외교로 일관한다면 정작 유사시 누가 우리를 도와줄 것인가도 자문해봐야 한다.
푸틴이 유럽 안보지도 재편을 노리고 있어 우크라이나 사태가 조속히 해결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런 만큼 대선 후보들도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 속에 대한민국 좌표가 무엇인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향해 “초보 정치인이 러시아를 자극하는 바람에 충돌했다”는 발언으로 국제적 비난거리가 된 수준으로는 ‘왕따·아마추어 외교’를 면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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