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英 공포의 잭 더 리퍼…왜 미제로 남았나

입력 2022-03-03 17:38   수정 2022-03-23 11:53

1888년 가을, 영국인들은 런던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사건 소식으로 공포에 빠졌다. 런던 동부 빈민가인 화이트채플에서 약 두 달 동안 5명의 여성이 차례로 목이 잘리고 잔혹하게 훼손된 시신으로 발견됐다. 범인을 짐작할 만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범인의 정체와 수법에 대한 ‘가짜 뉴스’가 퍼져나갔고, 경찰의 무능함을 비난하는 기사가 쏟아졌다. 범인은 찢는다는 의미의 ‘잭 더 리퍼’로 불렸으며 끝내 잡히지 않았다.

이 사건은 책, TV 드라마, 뮤지컬로 제작돼 잭 더 리퍼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쇄살인범으로 만들었다. 5명의 피해자는 매춘부로만 알려져 있다.

역사가이자 저술가인 핼리 루벤홀드는 《더 파이브》에서 희생자인 폴리, 애니, 엘리자베스, 케이트, 메리 제인의 흔적을 추적해 그들의 존재에 대한 진실에 접근한다. 저자는 다섯 피해자 중 셋은 매춘부였다고 할 만한 확실한 증거가 전혀 없다고 지적한다. 단지 빈민촌에 살던 하층민이었다는 이유로 이들의 존엄성이 훼손돼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들에 대한 방대한 분석으로 19세기 후반 사회구조도 고발한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은 역사상 최고 번영을 누렸지만 하층민의 삶은 처참했다. 피해자 중 세 명은 주변에 잘 알려진 노숙자였고, 살해 당한 밤에는 여인숙에 묵을 돈이 없었다. 잭 더 리퍼로 인한 공포가 지배하는 동안 언론은 화이트채플의 여인숙이 사실상 매음굴이며 그곳에 사는 여성 대다수가 매춘부라고 단언했다.

첫 번째 희생자인 폴리는 대장장이의 딸로 태어나 노동자인 남편과 임대주택에 살던 다섯 아이의 어머니였다. 간통한 남편과 별거하면서 혼자 살게 된 폴리는 노동자 계층에서 하층민으로 빠르게 추락했다. 두 번째 희생자인 애니는 상류층의 하인으로 일하며 중산층을 꿈꿨다. 하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남편과 헤어졌고 ‘남자 보호자’가 없는 여성은 버림받은 사람, 결함 있는 사람으로 치부되던 시대였다. 다른 남성을 만나는 순간 그는 부정한 여성이 됐다.

저자는 피해자들을 죽인 것은 살인마지만 그 배후에는 치안 사각지대에 놓인 하층민 여성의 삶이 있었다고 꼬집는다. 버려지고 병든 채 길이나 허름한 거처에서 잠든 그들은 죽어도 관심을 두는 이가 아무도 없었으므로 희생자가 됐다는 것이다.

최종석 기자 ellisic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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