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률이 높은 나라에서 내 삶의 방향을 찾다 [배움의 씨앗을 심다]

입력 2022-03-10 11:20   수정 2022-03-10 11:28

[한경잡앤조이= 에누마 김은파]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책장에 가득 꽂힌 책들 중 하나를 골라 펼치면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것이 재미있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더 생생한 경험도 많이 했지만, 어릴 적 책을 통해 했던 그 ‘여행’에는 나름의 특별함이 있었던 것 같다. 상상만으로도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만날 수 있는 데다, 머릿속에 그려볼 때 실제보다 더 멋있거나 맛있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이제는 언제 읽었는지도 모를 이야기들이 여전히 기억 속 어딘가 남아 있다가 불쑥 떠오르기도 한다. 이를테면 밤하늘의 별을 모두 훔친 도둑의 이야기라든가, 자신의 황금 깃털을 하나씩 뽑아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 준 새의 이야기 같은 것들이 말이다.

이렇게 일찍부터 책과 친해졌고, 생활에서든 학업에서든 읽고 쓰는 일이 어렵거나 부담스러웠던 적은 없었기 때문에,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과제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내가 깨달은 건 불과 10여 년 전의 일이다. 낮은 문해력으로 인해 생활에서 여러 불편함을 겪는 사람들의 마음을 처음으로 크게 느꼈던 것은 2012년 이집트에서였다.

당시 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으로 이집트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선거 운동 벽보를 보면 후보의 이름 옆에 별, 사다리, 저울처럼 알아보기 쉬운 그림들이 있었다. 글을 읽지 못 하는 사람들이 후보를 구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했다. 이집트의 문해율이 70%를 좀 넘는 것을 생각할 때, 인구의 약 4분의 1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볼 수 있으니 그런 기호가 꼭 필요할 만했다.투표 용지에도 동일한 기호들이 있어 설사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선거에서 자기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좋은 방식 같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후보자들의 이름을 읽는 것이 어려울 정도의 문해력이라면 일상 생활에서도 얼마나 많은 불편함을 겪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아랍어 문자를 잘 읽을 수 없다 보니 버스에 적힌 목적지나 안내 표지판 같은 것을 해독하는 데도 한참이 걸리는 신세라서 더 공감이 되었다. 그나마 나는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외국인이니 잠깐 불편하고 말 뿐이었지만,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문해력의 부재로 인해 자신의 권리와 직결된 것 마저도 누리지 못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 경험이었다.

그렇게 이집트에서의 경험을 계기로 하여 사회의 발전과 교육의 관계를 주요 관심사로 석사 공부를 하던 중, 2016년에는 우간다에 파견되어 초등학교 교사들의 역량 강화를 목표로 하는 사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사무실에서 한두 시간 떨어진 협력 초등학교 몇 곳을 매주 방문해서 실제 수업과 교사 회의를 참관하는 것이 내가 맡은 일 중 하나였는데, 어느 날 평소처럼 학교를 찾아갔다가 땅에 떨어진 시험지 한 장을 발견했다. 그 시험지는 초등학교 4학년 사회 과목 시험지였는데 주관식 문제의 답으로 적힌 것이 답과는 정말 거리가 멀었다. 예를 들어 “교통 체증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하나 쓰세요”가 문제라면, 질문에 있는 단어를 그대로 베껴서 “문제를 하나"라고 답을 쓴 것 같은 경우가 많았고, “경제 활동이란 무엇인가요?” 같은 질문에 “성수동"이라고 쓰는 식으로 자기 동네 이름을 적은 것도 있었다.



내가 마침 사회 과목을 어려워하는 학생의 시험지를 주웠을 뿐인 거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텐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우간다 시골 지역의 초등학교에서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생들의 학업 성취가 급격히 낮아져 5학년 영어 과목은 100점 만점에 평균이 14점, 과학은 그보다 더 심해서 100점 만점에 평균이 10점도 안 되었다. 이렇게 학업 성취 수준이 심각하게 낮은 것 또한 문해력과 연결된 문제로 보였다. 저학년 때 문해력의 기초가 충분히 다져지지 못 한 상태에서 학년을 올라갈수록 수준이 높아지는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기란 매우 힘들 것이었다.

심지어 우간다에서는 4학년 때부터 지역 언어 대신 공용어인 영어로 수업이 진행되다 보니 어려움은 가중될 수밖에 없어 보였다. 학습자들이 처음으로 글자를 배우고 읽기의 기초를 쌓는 바로 그 시기부터 이들이 좀 더 쉽게, 잘 학습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바람은 이때 좀 더 분명해졌다. 이미 학습 결손이 누적된 상태에서 문제를 해결하기란 더 어려워 보였고,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맨 처음 교실에서 느끼는 것이 막막함과 답답함이 아니었으면 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문해력을 열쇠로 삼아 새로운 세상을 만날 때의 재미나, (그것이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잘 해내고 있다는 성취감과 자신감을 느끼기란 어려울 테니 말이다.



우간다에서의 업무를 마치고 그곳을 떠나기 전에는 성인 문해교실을 여러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어릴 때 학교에 다니지 못 했던 50, 60대의 여성들이 주로 참여하는 곳으로, 매주 모여 읽고 쓰기를 가르치고 배우는 작은 문해교실이었다. 칠판에 적힌 단어 몇 개를 공책에 받아 쓰는 것은 이미 읽고 쓰기에 능숙한 사람이라면 1분도 걸리지 않을 일이었지만, 이제 막 글자를 눈에 익히기 시작한 분들은 거의 10분을 들여 글자를 하나씩 따라 그리곤 했다.

생업으로 바쁜 와중에 짬을 내어 참여하는 것이다 보니 실력이 늘기까지는 한참이 걸릴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이 분들의 눈은 수업 내내 반짝였다. 이들에게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가계부를 쓰거나 서류를 읽고 사인하는 등의 일상적인 일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지역 사회에서 좀 더 어깨를 펴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며 중요한 결정에도 참여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나이, 지역, 언어, 상황 등은 달라도, 글을 잘 읽지 못 해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삶과 학습의 토대가 되는 문해력을 갖추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내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진 집단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들이 더 쉽게 읽고 쓰기를 배울 수 있는지, 배움의 과정에서 만나는 장애물을 좀 더 가뿐하게 넘도록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는 나의 마음 한 켠을 오랫동안 차지한 고민이었다. 그랬기에 몇 년 전 에누마에 합류할 기회가 생겼을 때, 이곳에서 할 일이 이전의 일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염려보다는 기대가 되었다. 전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볼 기회가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누마는 모든 어린이를 위한 최고의 디지털 학습 도구, 좀 더 쉽게 말하자면 학습 앱을 만드는 회사다. 기술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되지는 못 하겠지만, 기술을 적절히 활용해서 잘 디자인한 제품은 어떤 이들이 학습에서 맞닥뜨리는 어려움을 좀 더 쉽게 넘어가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를테면, 어린이들이 열 번 스무 번을 틀려도 절대 답답해 하거나 화를 내지 않고 다시 도전할 수 있게 격려해 줌으로써 각자가 자기 속도에 맞춰 충분히 반복하며 학습할 수 있게 돕는 다정한 친구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

김은파 씨는 학습의 기회를 만들고 확장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이집트, 우간다, 한국 등에서 학습자를 만난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은 에듀테크 스타트업 '에누마'에서 어린이들이 즐겁게 읽고 쓰기를 배울 수 있는 앱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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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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