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형의 현장노트]유쾌·통쾌하지만…더없이 가벼운 ‘회란기’

입력 2022-03-11 11:36   수정 2022-03-21 16:21



두 배우가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등장합니다. 극이 시작되는가 싶었는데 관객에게 말을 겁니다. 극 중 몽둥이로 때리고 맞는 장면이 많은데 아무리 세게 쳐도 아프지 않은 연극 소품이니 놀라지 말라고 주의를 줍니다. 서로 때리고 맞는 시범도 합니다. 그러고는 관객 체험형 선물 이벤트를 진행합니다. 몽둥이로 실제로 맞아보고 아프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관객에게 ○○제약의 ○○연고를 준다는 건데요. 대학로 상업극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협찬 광고를 재치 있게 곁들여 잠시 배우와 관객이 어울려 놉니다.

지난 5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개막한 극공작소 마방진의 신작 '회란기'는 공연 직전부터 관객에게 '연극=놀이'임을 일깨웁니다. 인간의 본성인 '놀이성'이 풍부한 공연임을 예고하는 듯합니다. 세트나 장치가 전혀 없고, 아무런 꾸밈도 없는 텅 빈 무대는 이른바 '연극적 약속'을 최대한 활용한 공연임을 알려줍니다. 곧이어 등장하는 인물들의 분장이나 의상도 캐릭터의 특징을 관객들이 알아차릴 수 있는 선에서 최소화합니다. 이런 무대에 대한 연출의 변은 비슷합니다. 관객이 다른데 신경 쓰지 않고 배우의 연기와 대사에 집중하게 한다는 건데요. 연극의 놀이적 성격을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도 발휘합니다. 하지만 자칫하면 극의 '격(格)'이 떨어지는, 가벼워지는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이번 작품은 연출가 고선웅이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과 '낙타상자'에 이어 세 번째로 선보이는 중국 고전 각색 극입니다. '회란기'는 원(元)나라 때인 1200년대 중후반 활동한 극작가 이잠부가 쓴 유일한 현존작입니다.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코카서스의 백묵원'의 원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품의 핵심 모티브는 구약성서 열왕기상에 나오는 '솔로몬의 재판'과 같습니다. 판결을 통한 친엄마 찾기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사회에서 '양육권 분쟁'이 이슈가 됐음을 짐작게 합니다. 여기서는 법 위에 군림하는 절대적 권위를 가진 지혜로운 자의 존재를 전제로 합니다. '회란기'에서는 즉결처분을 내릴 수 있는 무소불위의 판관 포청천이 솔로몬 왕의 역할을 합니다. 칼로 아이를 쪼개서 나누는 게 아니라 석회로 원을 그려 두 엄마에게 아이의 양팔을 잡아당기라고 합니다. 모성애를 염두에 둔, 결과를 미리 알고 있는 예지력이 없으면 내릴 수 없는 무모한 명령이죠. 그러고는 이성적인 판결이 아니라 감성적인 판결을 내리죠. 법 조항과 판례를 따지는 현실 사회에선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석회 대신 백묵으로 원을 그려 줄다리기를 하죠. 두 작품의 공통점은 사실 이 장면밖에 없습니다. '백묵원'은 무엇보다 친엄마가 아니라 '진정한 엄마' 찾기라는 점에서 한수 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판결 장면까지 이르는 스토리는 제각각이고 꽤 깁니다. '회란기'는 일종의 사회풍자극인 '잡극(雜劇)'으로 분류되는데요. 그만큼 당시의 사회상을 날카롭게 반영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선량한 장해당이 가족을 먹여 살리려 기생이 됐다가 동네 갑부 마원외와 눈이 맞아 첩으로 들어가 아들을 낳습니다. 악독한 본처 마부인은 불륜남과 작당해 남편을 독살하고 장해당에게 누명을 씌웁니다. 재산을 상속받을 욕심에 장해당의 아이를 자기 아이라 주장하고, 산파와 동네 이웃을 매수합니다. 마부인의 이중삼중 계략에 무기력하게 당한 장해당은 동네 관아 1차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포청천이 있는 개봉부로 호송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철없던 오라비를 만나 반전의 기회를 맞습니다. 뭔가 구린내가 나는 판결을 그냥 넘어갈 리 없는 포청천의 혜안과 장혜당과 오라비의 무죄 호소로 다시 재판이 열립니다.



극은 예측 가능한 스토리를 단선적인 플롯으로 진행합니다. 지루해질 수 있는 뻔한 이야기를 유쾌하고 속도감 있게 전개합니다. 고선웅식 연출이 빛을 발합니다. 연출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푸르른 날에'에서 봤던 변형된 신파조 화법이 재등장합니다. 과장되고 가식적이고 비현실적이어서 재밌는, 대사 전달력이 뛰어난 희극 화법으로 연출가들이 종종 이용합니다.
극의 서사가 무척 친절합니다. 등장인물들은 관객에게 직접 말하는 방백으로 극 상황을 반복적으로 설명합니다. 관객은 앞뒤 장면을 맞춰 극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떠먹여 주는 대로 받아먹기만 하면 됩니다.
인형 캐릭터를 활용한 연희적인 양식 등 각종 놀이적 기법으로 웃음과 즐거움을 줍니다. 자유소극장의 극장 구조를 영리하게 활용한 동선 연출로 극의 역동감을 높입니다. '연극 소품'인 몽둥이를 지나치다 싶을 만큼 사용하는데요. 사실성과 놀이성을 동시에 살리며 시각적·청각적 쾌감을 줍니다. 졸음과 지루함을 쫓는 효과도 발휘합니다. 새도매저키즘적인 불쾌감을 줄 수도 있지만 관객들은 이미 공연 전에 예방주사를 맞은 상태입니다.
하이라이트인 판결 장면은 통쾌하기 그지없습니다. 포청천은 시원시원한 명령과 똑 부러지는 진행, 지혜로운 처사로 장해당의 누명을 쾌도난마식으로 벗겨줍니다. "진실은 파묻어도 햇빛에 드러나고, 거짓은 감추려 해도 쇠꼬챙이처럼 뚫고 나온다" 등 막힌 속을 확 뚫어주는 대사와 섬뜩한 형벌을 가차 없이 내리는 모습 등은 관객들에게 통쾌감과 일종의 대리만족감을 선사합니다.

한마디로 유쾌·통쾌한 연극입니다. '장해당' 역 이서현, '마부인' 역 박주연, '포청천' 역 호산 등 마방진 배우들의 호연도 돋보입니다. 하지만 개그적인 요소와 장치, 놀이적 기법 등이 지나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이런 요소들이 극에 활력을 주고, 놀이적인 재미를 주고, 드라마와 거리를 두게 하는 효과는 있지만 빈번하게 사용되다 보면 이 또한 식상해집니다. 극에 포함된 정극적인, 비극적인 면을 약화시킵니다. 연출가는 보도자료에 '연희적인 양식을 확대한 마방진식 대중극'을 표방했습니다. 대중극이라면 관객을 웃고 울려야 하는데 이번엔 울리는 쪽이 약했습니다.
'막 무친 겉절이처럼 놀이성과 문학성이 풍부한 원형의 연극'이란 언급도 있는데요. 연출 의도대로 해학적인 거리극이나 마당극 느낌도 납니다만 더없이 가벼워졌습니다. 이전 고선웅 연극이 주던 묵직한 감동과 깊은 여운이 덜했다면 이 때문입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사진=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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