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사회에서 권리와 의무는 보통 함께 간다. 참정권, 선거권이 대표적이다. 동전의 양면 같지만 그래도 100%의 완전 등가적 가치는 아니다. 투표는 일종의 국민적 의무지만, 본질은 권리에 더 가깝다. 역시 ‘4대 국민 의무’ 가운데 하나인 국방(병역) 의무도 ‘입대할 권리’와 나란히 비교하기 어렵다. ‘교육을 받을 권리’도 ‘(학교에 가야 할) 교육의 의무’와 비중이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 ‘납세의 의무’는 어떨까. 한국에서는 국민의 의무로 강하게 강조돼 왔다. 그렇다면 ‘납세자의 의무’와 대등한 개념으로 ‘납세자의 권리’는 어느 정도 용인·고취될 수 있을까. 납세 의무는 한국의 법률체계와 학교 교육에서 특별히 강조돼 왔다. 이제는 납세자의 권리에 대한 국가적·사회적 공론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도 납세는 의무일 뿐인가.
진정 유감스러운 것은 한국에서는 ‘납세자의 의무’만 강조돼 왔을 뿐 ‘납세자의 권리’는 뒷전으로 방치된 채 사실상 무시돼 왔다는 사실이다. 법률체계부터가 그렇다. 법에도 납세 의무가 주로 명시돼 있고, 초·중·고 교육도 다르지 않다. 세금에 관한 정책과 담론도 대개 그런 수준이었다. 헌법도 일반적 ‘국민의 권리’를 자세히 열거하면서 정작 세금을 내는 납세자로서의 권리에 대한 언급은 없다. 헌법은 납세의 의무를 독립조항(제38조)으로 명문화하고 있다.
납세 의무는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 의무가 중하다면, 나라 살림의 주체로서 납세자 권리도 존중돼야 한다. 징세 과정은 물론이고 혈세 지출까지, 그럼으로써 재정 전반에 대한 납세자의 주장과 요구가 국정에 충분히 반영돼야 한다. 하지만 그런 통로나 수단이 제대로 없다. 납세자의 권리 관점에서 본다면 현행 세제는 문제투성이다. 집값 대책 수단으로 전락한 부동산 관련 보유세·양도세·취득세부터 보편성을 결여한 소득세·상속세까지 왜곡과 오류가 쌓여 있다. 시행령을 통한 기형적이고 행정 편의적인 증세는 ‘조세법률주의’를 비웃을 정도다.
세금 지출에도 문제가 많다. 집행 규모와 지출 적합성으로 본다면 일자리 예산, 무분별한 과속 복지 같은 정책적 오류를 바로잡는 게 시급하다. 국가기관의 법인카드를 공무원 가족이 유용하는 공금 횡령까지 빚어졌다. 질이 나쁜 공공 범죄다. 납세자는 세금이 정당하게 쓰였는지 알 권리가 있고 제대로 쓰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 ‘건전재정 요구권’은 납세자의 기본권이다.
이런 상황에서 납세자의 권리가 유난히 강조되면 어떻게 되겠나. 기업인이든 개인이든 세금을 많이 내는 그룹의 사회적 목소리가 커진다면 우려스러운 ‘쏠림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납세자는 국민의 의무라는 차원에서 소득이나 자산에 비례해 묵묵히 납세를 해주고, 집단적 요구도 자제해주는 것이 국가 사회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대신 세금을 많이 내는 납세자들의 입장을 정치(국회)나 행정(정부)에서 반영해주면 된다. 그러기 위해 국회의원이 있고, 직업 공무원이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가는 게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을 줄이고, 지속가능한 국가 발전 시스템을 유지하는 길이다. 설령 ‘최선’이 아니어도 ‘차선’의 길이 된다.
물론 근로자의 40%가량이 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고, 법인세도 소수의 우량 대기업이 거의 전부를 부담하고 있는 현실은 개선돼야 한다. 재정을 유지하는 3대 세목에 포함되는 소득세와 법인세가 특정 납세그룹에 편중 부담되고 있는 것에 대한 개선은 필요하다. 다만 이들의 주장이 국정에 갑작스럽게 과잉 반영된다고 생각해보라. 가뜩이나 격차가 심각한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납세자 권리를 국정에 직접 반영할 방편도 마땅치 않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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