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위태로운 세계와 아이들의 아픔

입력 2022-03-14 17:56   수정 2022-03-15 00:06

북청군 신창읍이 고향인 나의 부친은 고교 2학년 때 혼자 피란을 내려왔다. 가족은 이북에 머물기로 하고 혹시 모를 참상을 피하기 위해 장남인 아버지만 먼저 피란 보낸 것이다. 온갖 고생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국군에게 체포돼 포로가 될 위기에 처했다. 수학에 재능이 있었던 아버지는 국군에게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설명해 인민군이 아니라 고교생임을 증명했고 겨우 포로 신분에서 풀려났다. 이후 아버지는 국군에 입대해 6·25전쟁 후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았지만, 여전히 실향민이다. 북청군 북청읍이 고향인 어머니 역시 실향민이다. 영화에서 묘사된 메러디스빅토리호의 맨 아래층에 몸을 싣고 흥남을 탈출해 거제항에 도착한 피란민 소녀였다.

70여 년 전 일어난 전쟁은 나의 부모님을 포함한 수많은 아동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고, 참혹하고 잊을 수 없는 아픔을 남겼다. 많은 사람이 우크라이나 사태를 목도하며 연민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도 과거 전쟁의 상처를 아직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모두에게 전쟁이 ‘과거 시점’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지난 70년간 크고 작은 분쟁은 쉴 새 없이 이어져 왔고, 특히 2010년 이후로는 더 빈번해져 분쟁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는 10년 전 대비 두 배가 됐다. 세계적으로 실향민과 난민도 매년 늘어나, 우크라이나 사태 이전에도 그 수가 약 8400만 명이었다. 한반도 전체 인구보다 더 많은 이들이 ‘현재’ 삶의 터전을 잃고, 과거 내 부모님처럼 낯선 곳에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분쟁이 고조되면서 우리 아이들의 세계는 더 위태로워졌다. 월드비전에서 일하며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남수단 예멘 소말리아 콩고 우크라이나와 같은 위험한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어른들의 싸움으로 채우게 된 아이들의 사연을 자주 접하게 된다. 공습으로 아버지를 잃고 난민촌 텐트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는 15세 소녀, 난민촌 주변에서 발견된 폭발물이 장난감인 줄 알고 집에 가져왔다가 사망한 7세 소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고 우울감에 빠진 아동…. 이들의 아픔은 어느 소수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 아동 3분의 2에 해당하는 약 16억 명이 분쟁국에 속해 있으며, 아동 6명 중 1명은 분쟁 발생 지역 근거리에 거주하고 있다.

우리와 연결된 엄청난 수의 아동이 전쟁으로 아파하고 있다. 그들의 아픔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다. 미국인 에드나 어머니가 머나먼 피란민 가정의 나를 도운 건 내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끌어안았기 때문일 것이다. 에드나 어머니의 사랑은 나에게 방패였다. 분쟁의 참혹한 공격으로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은 모든 아이에게 내가 받았던 방패를 쥐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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