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외국인 소믈리에도 얻기 힘든 타이틀의 주인공은 이마트의 와인 수입을 총괄하는 신근중 담당(사진)이다. 2002년 이마트에 입사한 이후 지금까지 20년간 와인 바이어 한 우물을 판 국내 와인시장의 산증인이다. 처음 와인 바이어를 맡았던 2002년 연 8억원에 불과했던 와인 매출은 지난해 1500억원으로 폭증했다. 단일 유통기업 최고 실적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발효에 맞춰 미국에서 들여온 ‘반값’ 미라수 와인, 국내 시장의 성장 기폭제가 된 ‘4900원’ 도스 코파스가 모두 그의 작품이다.
14일 서울 성수동 이마트 본사에서 만난 신 담당은 “시음을 많이 한 탓에 치아가 착색돼 한 달에 한 번 스케일링을 받아야 할 정도”라며 “인터넷도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 와인 바이어를 맡아 외국 원서를 번역해가며 공부했던 게 지금의 결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일반 대중과 와인의 거리를 좁힐 수 있을지 고민하던 신 담당은 아메리카노 한 잔이 4000원대라는 점에 착안해 ‘4900원 와인’ 개발에 나섰다. 세계 ‘가성비’ 좋은 와이너리를 뒤져 도스 코파스를 찾은 뒤 소믈리에 여섯 명을 불렀다. 국내에서 잘 팔리는 2만~3만원대 와인 30종과 4900원에 판매할 도스 코파스를 섞어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기 위해서다.
여섯 명 모두가 도스 코파스를 5위 안으로 꼽자 그는 개발을 결심했다. 처음엔 칠레 와이너리로부터 “도저히 맞출 수 없는 가격”이라고 핀잔을 들었다. 신 담당은 “‘100만 병 사가면 생각해보겠다’는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자 현지 와이너리도 놀란 반응이었다”고 했다. 100만 병은 일반 와인 수입 시 보장하는 3000병의 300배가 넘는 규모다.
신 담당은 가성비 와인뿐 아니라 보르도 그랑크뤼 1등급 와인 등 고가 상품도 꾸준히 도입하며 ‘마트 와인’의 편견을 깨나갔다. 이 과정에서 넓힌 글로벌 네트워크 덕분에 보르도 메독 지역에서 기사 작위를 받은 데 이어 스페인 바쿠스 국제 와인대회 심사위원으로 초빙되는 ‘핵심 인사’가 됐다.
신 담당은 앞으로 국내 와인시장이 일본과 대등한 레벨까지 올라가 ‘아시아 톱’ 수준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미 한국 시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해외 와이너리들이 국내에 단독 사업장을 여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보통 와인 선진국은 레스토랑보다 가정의 비중이 높고, 식사와 와인이 결합된 형태입니다. 와인을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거죠. 한국도 이제 식탁에 식전주로 스파클링 와인이 올라올 정도로 대중화가 이뤄졌습니다.”
신 담당은 자신의 작품인 도스 코파스를 올해 단종할 계획이다. 이미 와인 시장의 수준이 높아져 처음 생각했던 역할을 다했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젊은이들이 돈을 모아 오마카세를 즐기듯 양보단 질을 중시하는 식문화가 자리잡고 있다”며 “2만원 안팎으로 ‘제2의 도스 코파스’를 새롭게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한신 기자 phs@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