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볼라 페스트 탄저균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감염병예방법에 따라 ‘1급 감염병’으로 분류된 이들 전염병에는 공통점이 있다. 치명률이 매우 높거나 집단 발생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2급인 결핵, 수두나 3급인 B형간염, 뎅기열 등과 비교하면 1급 감염병의 파괴력과 전파력이 얼마나 센지 가늠할 수 있다.
코로나19는 2년 전 국내 상륙 직후 1급 감염병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강도와 속도 모두 1급이 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후 델타와 오미크론으로 변신하면서 파괴력은 줄어들었다. 그사이 대다수 국민이 맞은 백신도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힘을 빼는 데 한몫했다. 이 덕분에 ‘오미크론 천하’가 된 현재 치명률은 0.1% 이하로 계절독감 치명률(0.05∼0.1%) 수준으로 떨어졌다. 정부가 코로나19에 대한 감염병 등급 하향 조정 검토에 나선 배경이다.
하지만 코로나19의 전파력이 역대 최강인 점, 매일 200명 넘는 사망자를 낳는 점, 아직 유행이 정점에 이르지 않은 점 등을 감안할 때 16일 김부겸 국무총리의 감염병 등급 하향 조정 검토 지시는 섣부른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확진자가 너무 많이 나오는 탓에 국가 방역 시스템이 붕괴 직전에 이른 것도 등급 조정 필요성을 부른 요인으로 꼽힌다. 확진자가 알아서 검사받고, 격리하고, 치료하는 ‘셀프’ 시스템으로 전환된 지 한 달이 넘었기 때문이다. 2~3급 수준의 관리도 안 하고 있는 만큼 등급도 현실에 맞게 낮춰야 한다는 얘기다.
코로나19가 하향 조정되면 관련 방역 시스템도 완전히 바뀐다. 확진자 발생 보고 및 격리 조치부터 변경된다. 1급 감염병의 경우 의료진은 확진자를 확인하는 즉시 방역당국에 신고하고, 음압병실 등에 격리해야 한다. 반면 2~3급은 24시간 이내에 신고하면 된다. 1급과 달리 강제격리 의무가 없는 만큼 확진자는 상황에 따라 일반병실에서 치료받을 수 있다. 매독 독감 등 4급은 유행 여부를 조사하기 위한 ‘표본 감시’만 하면 된다. 1급 지위를 잃으면 치료비도 ‘국가 전액 지원’에서 ‘확진자 일부 부담’으로 바뀐다. 생활지원비도 없어질 가능성이 높다.
사회적 거리두기도 완전히 해제된다. 1급도 아닌 감염병에 사적 모임 제한을 강제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는 일단 ‘6인·11시’(최대 6인이 밤 11시까지 식당·카페에서 모임) 규제를 다음주부터 ‘8인·자정’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이날 열린 일상회복지원위원회 의견 등을 감안해 18일 조정안을 발표한다.
하지만 ‘오미크론은 별거 아니다’란 인식을 밑바탕에 깐 김 총리의 감염병 등급 하향 조정 검토 지시가 안 그래도 해이해진 국민들의 방역 의식을 다시 한번 ‘무장해제’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신규 확진자, 위중증 환자, 사망자 등 3대 지표가 연일 사상 최다치를 갈아치우는 상황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교수는 전날 페이스북에서 “독감 치명률과 비교하는 말장난은 그만두라. 독감 확진자도 하루 40만 명씩 발생하면 의료체계가 붕괴된다”고 쓴소리를 쏟아냈다.
이날 오후 9시 기준 확진자는 54만9854명으로 사상 처음 50만 명 벽을 깼다. 전날 양성 판정을 받았지만 질병관리청 시스템 오류로 누락된 확진자들이 이날 집계에 포함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15일 40만741명에 이어 16일 60만 명에 가까운 확진자가 나옴에 따라 “오미크론 정점 규모는 주간 하루 평균 37만 명 정도”라는 지난 14일 정부 예측은 또다시 빗나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오상헌/이선아 기자 ohyea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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