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당선인이 당장에 국민의 인기를 얻는 것보다 미래에 존경받는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연금개혁, 국가부채 관리 같은 인기 없는 정책을 뒤로 미루지 말고 국민을 잘 설득해서 처리해나가야 합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국가 미래를 내다보고 공약을 재검토해 국민이 원하는 대로 다 못 해주는 것에 대해 솔직히 양해를 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대선 결과는 정권심판의 의미도 있지만 그만큼 사회가 분열돼 있음을 드러낸 것”이라며 국민통합이 윤 당선인의 최대 과제라고 했다. 이를 위해 사회 시스템이 공정하게 작동하도록 무너진 법치주의를 바로 세우면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고 국민통합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인사만 잘해도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그러면 국민이 신뢰하고 국정 운영의 동력도 생긴다”며 실력과 전문성을 잣대로 등용하되 편 가르기를 배제하고 인재풀을 넓혀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 전 총리를 지난 16일 서울 서초동 호암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윤석열 후보 당선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봅니까.
“더불어민주당의 행태와 문재인 정부의 실정에 대한 심판 성격이 컸습니다. 다만 근소한 득표율 격차(0.7%포인트)에서 보듯 국민의힘이나 윤 당선인을 전폭 지지한 건 아닙니다. 윤석열 정부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하고 민주당은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민심은 말 그대로 ‘두 동강’ 났습니다.
“그만큼 한국 사회의 갈등이 심각한 수준입니다. 6·25 전쟁으로 대표되는 이념 투쟁과 압축 성장 과정에서 갈등이 심화됐습니다. 정치권은 갈등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증폭시켰습니다. 그 결과 국민 사이에 팽팽한 대립 구조가 형성됐다고 봅니다.”
▷역대 정부도 갈등 해소를 기치로 내걸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김대중 정부는 갈등 해소와 봉합을 위해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이후로는 그런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갈등이 계속 쌓였고 문재인 정부에서 크게 증폭된 것으로 봐야겠죠.”
▷문재인 정부 5년을 두고 ‘공정과 상식, 법치주의가 무너진 시간’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법치주의가 많이 훼손됐습니다. 부동산 정책과 소득주도성장 등 국가 정책이 만들어지고 집행되는 과정에서 국민 전체 의사가 제대로 결집되지 않았습니다. ‘내 편 네 편’을 가른 뒤, 내 편을 중심으로 소수 의사가 반영된 정책이 만들어지고 집행됐죠. 그런 독선적이고 오만한 자세로 문제에 접근했기 때문에 원래 의도했던 정책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반성하는 노력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국민 분열만 부추겼죠.”
▷국민통합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사회 갈등의 해결책은 시스템이 공정하게 작동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국민이 정부를 신뢰할 수 있고, 통합의 기초가 마련될 수 있습니다. 윤 당선인은 공정과 상식, 법치주의 회복을 내걸었습니다. 법치주의를 실질적으로 실천한다면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생겨나고 국민 통합도 가능해질 겁니다.”
▷‘대장동 수사’를 두고 정치보복 논란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수사를 정치보복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상당수 국민은 진상이 뭔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납득하고 수용할 수 있는 법과 원칙의 테두리 내에서 사실관계를 밝히는 것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검찰이나 경찰이 정치보복으로 국민이 오해할 행태를 보여선 안 되겠죠.”
▷총리 재임 시절 ‘공정사회론’을 설파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공산주의보다 우월한 성과를 낸 것은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경쟁을 통해 더 많은 성과를 이뤄낸 것이죠. 공정한 사회는 법과 원칙에 따라 자유롭게 경쟁해 승자를 결정하고 또 낙오한 사람은 국가가 배려하는 사회입니다. 법과 원칙이 무너진다면 그것은 공정사회가 아닙니다. 소위 ‘떼법’이나 ‘국민정서법’ 등 비합리적 요소를 동원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는 사회는 불공정한 사회입니다.”
▷‘제왕적 대통령제’에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걸로 압니다.
“이번 대선은 ‘승자독식’에 따른 대립과 갈등을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정당 대 정당 간 대결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 대결을 벌였죠. 그것도 후보로 나선 개인을 완전히 발가벗겨서 펼치는 대결이었습니다. 국민 입장에선 어느 쪽을 지지하든 굉장히 고통스러운 선거였습니다. 개인 간 일대일 대결이 아니라 정당 대 정당, 정책 대 정책의 구도로 가야 국가가 품위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선 권력이 분산되고 협력과 견제가 원칙 있게 이뤄지도록 정치 시스템이 바뀌어야 합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줄이는 개헌이 필요한 것이죠.”
▷권력 구조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는군요.
“대통령이 너무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통령 주변 세력이 사실상 모든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구조예요. 권력을 분산해 견제와 협력이 가능하도록 바꿔야 합니다. 총리의 권한을 강화하는 이원집정부제나 분권형 대통령제, 혹은 의원내각제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내각제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대통령제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곳은 미국이 유일한데 지금은 미국도 많은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통계적으로도 내각제를 채택한 국가의 정치와 경제 수준이 더 높습니다. 독일이 성공 모델입니다.”
▷내각제가 극심한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대통령이 잘하든 못하든 한 번 뽑아 놓으면 달력을 보면서 5년을 꼬박 기다려야 합니다. 오죽하면 ‘투표를 한 자기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내각제에서는 총리에 대한 국민 여론이 악화하면 바로 의회가 후임 총리로 갈아치웁니다. 잘하는 사람은 더 길게, 못하는 사람은 1년 만에 퇴출시키는 정치가 가능한 것이죠. 그러면 대통령을 바꾸겠다고 광화문에 나가 시위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국민의 대표(국회의원)를 뽑아놨으면 거기서(국회) 문제를 해결하는 시스템이 맞습니다.”
▷이번 대선은 ‘역대급 포퓰리즘 대결’이었습니다.
“국가 이익 관점에서 공약을 그대로 관철시키는 것이 옳은지 심도 있는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물론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다면 국민에게 솔직히 설명하고 납득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죠. 저는 윤 당선인이 당장 국민에게 인기를 얻지 못해도 먼 미래에 존경받는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인기 없는 정책이라도 미루거나 게을리하지 말고 잘 챙겨야겠죠.”
▷인기 없는 정책으로 염두에 둔 게 있습니까.
“연금개혁과 국가부채 관리는 인기가 없는 정책이라 추진하면 당장은 괴롭고 힘들 겁니다. 그렇지만 미래 세대를 위해선 꼭 필요합니다. 국가부채는 급격히 늘어나지 않도록 재정준칙과 같은 기준을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목표를 정해서 일정 선을 넘지 않도록 노력해야죠. 정말로 지출 증대가 필요하면 국가부채를 늘리기보다는 국민 양해를 구해 필요한 범위에서 증세를 하는 게 옳습니다. 증세를 하는 한이 있어도 국가부채는 함부로 늘려선 안 됩니다.”
▷‘인사가 만사’라고 합니다. 윤석열 정부 인사에 조언을 한다면요.
“당선인은 실력 있는 전문가 중심의 진용을 짜겠다고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정치적 고려나 불합리한 요소에 의한 안배는 최대한 멀리 해야겠죠. 편을 갈라 어느 한쪽을 배제하지 말고 국가 전체 인재풀을 놓고 인사를 해야 합니다. 대통령이 내 편 네 편을 가리지 않고 최고 전문가를 등용하면 국민은 신뢰를 보낼 겁니다. 당선인이 원래 정치권에 몸담은 분이 아니니 인사를 잘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차기 총리는 어떤 분이 맡아야 합니까.
“당선인은 책임총리가 내각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그러려면 원숙하게 내각을 잘 통할해나갈 경륜과 역량이 있는 인물이 필요합니다. 누가 봐도 어느 한쪽 진영을 대표하는 것으로 비치지 않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당선인은 총리 역할 강화도 공언했습니다.
“대통령과 총리 간 상당한 역할 분담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안별로 확실히 총리에게 위임을 해서 역할과 활동 공간을 마련해줘야 합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저에게 위임해 복잡한 사안을 처리하게 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주 해군기지와 LH(한국토지주택공사) 본사 이전,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조성 등이 대표적인데요. 다행히 저에 대해선 별다른 정치적 고려 없이 원칙에 따라 국정을 이끌어간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문 정부의 ‘안미경중(安美經中)’ 줄타기 외교를 어떻게 보는지요.
“외교 문제는 국익과 국제규범의 잣대로 바라봐야 합니다.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편을 들고 줄을 서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국가안보는 가장 중요한 국익입니다. 미국은 우리와 자유·인권·정의·법치 등 인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죠. 한·미 동맹을 굳건히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적으로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국가라 관계를 잘 관리하고 유지해야겠죠. 하지만 만일 중국이 ‘내 편을 들어라’라고 한다면 그때는 국익과 국제규범에 부합하는지의 관점에서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따르지 않으면 당장 조금 손해될 것을 우려해 원칙 없이 흔들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한·일 관계는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물론 일본이 우리에게 합당한 사죄나 조치를 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경제나 문화 교류 측면에서는 인류 보편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국가적 협력은 계속 유지·발전시켜야 합니다. 여기에 ‘죽창가’와 같은 민족 감정을 내세운다면 하수 중의 하수입니다. 반일(反日) 감정을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것은 앞에서는 멋있을지 몰라도 뒤로는 ‘밑지는 장사’, 국익을 해치는 일입니다.”
■ 약력
△1948년 전남 장성 출생
△광주제일고, 서울대 법학과 졸업
△14회 사법시험 합격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광주지방법원장(2004년)
△대법원 대법관
△21대 감사원장
△41대 국무총리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2017년~)
△호암재단 이사장(2018년~)
△삼성문화재단 이사장(2020년~)
정리=오형주 기자
역대 獨 총리들 대화와 타협의 정치
정치적으로 자신의 정파에 불리해도
국익 위해서라면 손해 감수하고 추진
김황식 전 국무총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총리 재임 시절인 2011년 11월 연평해전 전사자 1주기 추모식장. 행사 도중에 갑자기 비가 내렸다. 경호원이 우산을 펼쳐 들자 그는 “괜찮다. 치우라”고 했다. 30여 분간 흠뻑 비를 맞으며 장병들의 희생을 추모하는 모습(사진)은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겸손하고 소탈한 성품, 정치적 고려 없는 실용적인 국정 운영으로 국민의 신망을 얻은 재상으로 아직도 기억되고 있다.
지난 16일 김 전 총리를 인터뷰하기 위해 방문한 호암재단 집무실 책상엔 올 1월 그가 펴낸 저서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이 여러 권 쌓여 있었다. “우리 정치인과 국민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 책을 썼습니다.”
그는 2013년 총리직에서 퇴임한 뒤 독일 베를린자유대에서 6개월간 독일 정치, 통일 문제를 연구했다. 이후에도 틈틈이 공부를 계속한 결과물이 이 책이다. 젊은 시절 잠시 독일에서 법률 공부를 한 적이 있는 그는 총리로 일하다가 우리가 참고할 국가 발전 모델로 독일의 가치를 깨닫게 됐다고 한다.
김 전 총리는 2차 세계대전 후 패망한 독일이 경제적으로 부흥하고 통일을 이뤄 지금은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데는 정치의 역할, 특히 총리들의 리더십이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독일 역대 총리들은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대화와 타협의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기영합 정책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지켜온 겁니다. 정치적으로 본인과 자신의 정파에 불리한 사안이더라도 국가 이익과 장래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손해를 감수하고 추진했습니다. 이것이 독일 총리 리더십의 핵심입니다.”
전후 초대 독일 총리인 콘라트 아데나워(재임 1949~1963년)는 중립화를 전제로 한 소련 스탈린의 독일 통일 회유를 물리쳤고, 빌리 브란트 총리(1969~1974년)는 독일의 장래와 유럽의 미래를 위해 폴란드에 편입된 자국 영토 회복을 포기했다. 헬무트 슈미트 총리(1974~1982년)는 기민당 아데나워의 ‘친서방 정책’을 계승하고, 자신이 속한 사민당 브란트의 ‘동방 정책’을 융합해 동서 화해와 협력을 이끌어냈다. 특히 국가 안보를 위해 자기 정파 지지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핵무기 관련 ‘이중결의’를 했다. 소련의 동유럽 전술핵 배치에 맞서 서독도 전술핵을 배치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소련의 핵무기 감축협상을 이끌어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1998~2005년)는 통일 후유증에 시달리는 독일의 경제 회복을 위해 지지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르츠 개혁(노동개혁)’을 단행했다. 모두가 독일의 이익과 미래를 위한 것이고, 대중인기영합주의와는 반대의 길을 걸은 것이다.
김 전 총리는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지도자들도 그런 사례가 있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여론 주도층인 지주들에게 손해가 될 농지개혁을 과감히 밀어붙였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문화 개방,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이 고비마다 과감한 결단을 내린 사례입니다. 하지만 최근엔 표를 얻기 위한 인기영합적인 퍼주기 공약만 판을 칩니다. 국민에게 인기 없는 정책을 과감히 추진하는 리더를 찾기 어려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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