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에 따른 서방국가들의 러시아 제재 등의 영향으로 일주일 남짓 동안 크게 출렁인 국제유가를 따라 글로벌 증시도 춤을 췄습니다. 당연히 유가 흐름에 따라 피해를 받는 업종과 수혜가 기대되는 업종이 나뉘었죠.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국제유가가 오르면 경기민감주가 상승한다’는 공식에서 어긋나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잠시 제쳐두고 우선 최근 국제유가 흐름부터 짧게 짚어 보겠습니다.
지난 8일까지 국제유가가 오르는 국면에서도 기울기가 가팔랐습니다. WTI의 지난달 종가가 배럴당 95.72달러였으니, 고점인 지난 8일까지 6거래일만에 29.23%가 상승했군요.
전쟁으로까지 번진,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러시아와 서방국가의 갈등이 국제유가를 밀어 올렸습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서방국들의 제재가 이어지면서 러시아산 석유와 천연가스가 국제 시장에서 퇴출될 수 있다는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러시아는 산유국들의 모임인 석유수출국기구플러스(OPEC+)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가장 목소리가 큰 나라로 꼽힐 정도로 석유 수출이 많은 나라입니다.
반대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지정학적 위험이 완화될 조짐이 나타나자 국제유가가 가파르게 하락했습니다. 이에 더해 미국과 이란 사이 핵협상의 타결 조짐에 그 동안 글로벌 석유시장에서 퇴출돼 있던 이란산 석유 공급이 재개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부풀자 국제유가는 맥없이 주저 앉았죠.
하지만 실제 국제유가가 오르면 정유사의 영업이익이 크게 증가합니다. ‘재고평가이익’이라는 장부상 이익 때문입니다. 정유사가 원유를 매입한 뒤 석유제품으로 만들어 팔기까지는 보통 2~3개월이 걸립니다. 이 기간동안 국제유가가 오르면서 얻게 되는 이익이라고 보면 됩니다. 대신 유가 하락 국면에서는 ‘재고평가손실’이라는 현금 유출이 없는 손실이 생기기도 하죠.
현재 한국 증시에서 ‘순수 정유주’로 분류할 수 있는 종목은 에쓰오일(S-Oil) 뿐입니다. 이 회사 주가는 작년 한 해동안 23.84%가 올랐습니다. 같은 기간 WTI의 상승률은 54.99%고요. 올해 들어서도 연초에는 가파르게 올랐지만, 이후 국제유가 상승세가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조정을 받다가, 이달 들어서는 다시 비슷한 흐름으로 복귀했습니다.
정유사들이 차세대 먹거리를 찾아 나서면서 국제유가와 주가의 연관성이 많이 약해진 모습입니다. SK이노베이션은 이제 주식 시장에서 2차전지 관련주로 인식되고 있고, S-Oil도 최근 몇 년 사이 석유화학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중입니다.
원가가 오르면 제품 가격도 오르는 게 당연하지만, 이번엔 그렇지 못했던 배경은 석유화학기업들이 미리 호황을 다 누렸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 확산 사태로 국제유가가 폭락한 뒤 완만하게 회복하던 국면인 작년 초까지는 석유화학기업들의 주가가 급등한 바 있습니다.
감염병의 확산으로 위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플라스틱·합성고무의 수요가 늘어 가격은 급등하는데, 국제유가(원가)는 상대적으로 천천히 오르면서 수익성이 급격히 향상된 덕이었습니다. 이후 작년 말까지 석유화학기업들의 호실적은 계속됐지만, 시황의 정점(피크아웃) 우려에 주가는 내리막을 지속해왔습니다.
석유화학제품 가격과 국제유가가 비슷한 수준에서 오르는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석유화학기업의 주가도 국제유가에 연동되는 경향을 나타냅니다. 이익이 늘어나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100원 어치 나프타를 투입해 만든 플라스틱을 150원에 파는 상황에서 가격이 10%씩 오르면 석유화학 기업들의 이익은 50원에서 55원으로 증가합니다.
비슷한 논리가 대부분의 경기민감주에 적용됩니다. 수요나 공급의 충격으로 가격이 급등락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국제유가가 오른다는 건 경기가 좋다는 말과 같으니까요. 각 산업의 상황에 따라 시장이 갖다 붙이는 논리만 다를 뿐입니다.
경기민감주이자 유가 상승 수혜주로도 꼽히는 철강주와 조선주를 살펴보겠습니다. 두 산업은 석유를 포함한 화석연료를 생산하거나 운송하는 데 필요한 걸 만듭니다.
조선사들은 해저 유전에서 석유를 퍼올리는 설비를 짓습니다. 국제유가가 오를 때마다 해양플랜트 발주가 기대된다는 식의 기사가 나오죠. 다만 이번 국제유가 급등 국면에서는 조선주들이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국제유가가 오르기 앞서 러시아에 대한 제제로 새로운 해저유전이나 유조선·가스운반선이 많이 필요해질 것이란 기대에 주가가 미리 상승했기 때문이죠.
조선사는 해양설비를 짓는 데 철을 많이 사용하기에 철강주도 유가 상승 수혜주로 분류될 때가 있습니다. 조선사에 공급하는 철강제품이 아니더라도, 육상 유전을 개발하는 데 투입되는 강관도 철강기업들이 만듭니다.
해운기업들은 조금 복잡해졌습니다. 실제 이번 유가 급등락 국면에서 해운기업들의 주가는 뚜렷한 방향성을 나타내지는 못했죠. 유가 상승이 비용을 늘리는 면이 있지만, 반대로 유조선 시황에 훈풍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에 더해 최근에는 환경 규제로 인해 친환경 설비를 장착해둔 선박이 얼마나 되느냐도 수익성에 영향을 주는 또 다른 변수로 등장했습니다.
현재 국제항로를 운항하는 선박들은 황산화물 비율이 0.5% 미만인 배기가스를 배출해야 하는 규제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선사들은 황산화물을 걸러내는 스크러버(탈황설비)를 달거나, 정유사가 미리 황을 제거한 저유황유를 사용해야 하죠. 최근 기존 선박유인 벙커C유와 저유황유의 가격 차이가 크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항공유 수요가 늘어날 것이란 기대에 정유사들이 저유황유 생산을 줄였기 때문입니다.
이번 국면 이전까지는 세계적인 탄소 중립 트렌드가 거셌기에, 국제유가가 경제지표로서 차지하는 위상도 후퇴하는 중이었습니다. 국제유가 급등세가 나타난 뒤에는, 이로 인해 신재생에너지 산업의 확장이 더 촉진될 것이란 전망도 나옵니다.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는 걸 두고 ‘정해진 미래’라는 수식어까지 붙습니다. 석유 공급에 충격이 가해질 것이란 전망으로 국제유가가 급등락하고 이게 다시 글로벌 증시를 흔든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이런 투기적 거래는 주식시장에서 더 많이 나타납니다. 한 중소형 종목의 경우 국제유가가 꿈틀거리던 1월 중순께부터 갑자기 급등세를 타기 시작하더니 두 달여만에 주가가 110% 넘게 오른 뒤, 현재는 고점 대비 30% 가량 빠져 있습니다. 고점 대비 낙폭은 비슷하지만, 상승폭은 국제유가의 2배에 달합니다.
종목명에 정유 산업과 큰 관련이 있는 단어가 포함돼 매번 정유주로 분류되지만, 이 회사의 주력사업은 아스팔트 제조·판매입니다. 아스팔트를 원유정제 부산물로 만들기에 석유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회사의 2020년 사업보고서를 보면 아스팔트 부문의 매출에서도 상품 매출 비중이 80%를 웃돕니다. 만들어 파는 것보다 사온 뒤 되파는 게 더 많다는 겁니다. 연도별 영업이익 추이를 봐도 국제유가 추이와 연관성이 확인되지는 않습니다.
이 쯤에서 올해 들어 국제유가가 고점을 찍은 지난 8일까지 국내 증시에서 가장 많이 오른 순서대로 종목 30개를 순서대로 나열해보겠습니다. 이중 14개가 석유 관련 종목입니다. 국제유가 수익률을 2배로 추종하는 레버리지 ETF·ETN 4개 종목의 수익률이 162~172%로 가장 높았습니다. 7개는 국제유가나 천연가스 가격을 추종하는 ETF·ETN이고요.
개별 기업으로는 한국석유(111.95%), 중앙에너비스(91.17%), 지에스이(64.31%)가 포함돼 있습니다. 중앙에너비스는 주유소 사업을, 지에스이는 도시가스공급사업을 각각 주력 사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석유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업을 하는군요.
국제유가가 급락한 지난 8~17일은 어땠을까요. 상승률 상위 30위까지의 명단에 석유 관련 기업은 없었습니다. ETF·ETN은 국제유가 수익률의 2배를 반대로 추종하는 종목 2개와 유럽탄소배출권 가격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종목 3개가 포함돼 있습니다.
가장 크게 빠진 종목 순위권에 국제유가 상승기에 크게 오른 종목들이 대부분 들어 있었습니다.
한경우 한경닷컴 기자 cas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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