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길곤의 행정과 데이터과학] '풀 수 있는 문제' 구분하는 겸손한 정부 돼야

입력 2022-03-20 17:42   수정 2022-03-21 00:03

정부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문제는 얼마나 될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예산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정부 예산은 크게 프로그램, 단위사업, 세부사업, 그리고 내역사업으로 분류되며 2021년의 경우 8590개의 세부사업이 편성됐다. 각 세부사업은 다수의 내역사업으로 구성되는데 국고보조금이 지급되는 것만 5373개에 달한다. 전국에는 3495개의 읍·면·동이 있다. 행정구역별로 당면한 문제를 3개씩만 제기해도 1만 개가 넘는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운영하는 민원빅데이터 시스템에서 파악한 2021년 민원 건수는 1500만 건이 넘는다. 이외에도 소득 불평등, 양성갈등, 세대갈등, 지역갈등, 통일, 국가안보 등 국가의 존망과 사회 안정을 위해 풀어야 하는 중차대한 문제가 있다. 정부가 이런 상황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모든 문제를 다 풀겠다고 호언장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부가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푸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도 위험하다. 소득 불평등, 부동산, 경제 성장, 안보, 성차별, 환경문제 등 근본적인 문제를 풀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절대 쉽지 않다.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주장하기 전에 그동안 수많은 사람이 풀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겸손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다음 정부는 이전 정부가 추진했던 노력을 인정하고 정책의 어려움을 충분히 인지해야 할 것이다. 짧은 기간에 난도 높은 문제를 해결해 국민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고 싶다는 욕심으로 정책을 펴면 문제를 풀 수 없을 뿐 아니라, 정작 풀어야 할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할 위험이 크다. 작지만 시민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문제들 말이다.

정부가 꼭 풀어야 할 문제를 선정하기 위해서는 어떤 작업이 필요할까? 첫째, 풀어야 할 문제의 수를 줄여야 한다. 공무원을 적폐라 부르고, 기업인을 탐욕스런 집단으로 매도하고, 지지하지 않는 시민을 포용하지 않는 정부는 문제를 원점에서 검토하다가 의욕 과잉으로 지쳐버리게 된다. 공무원, 시민, 기업이 스스로 답을 찾아갈 플랫폼만 제공해도 의외로 많은 문제가 쉽게 풀릴 수 있다. 계획경제를 시도했던 공산주의 국가가 실패한 것도 사회 구성원의 자율성을 신뢰하는 대신 정부가 모든 문제를 풀려고 했기 때문이다. 최근 ‘플랫폼 정부’라는 용어가 생겨나면서 이를 마치 특정 정부 조직 형태로 오해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하지만 플랫폼 정부가 주장하는 것은 사고의 전환이다. 정부가 일방적·폐쇄적으로 문제를 푸는 것을 경계하고 상호연계를 통한 부가가치 창출을 위해 소통과 협업을 중시하는 것이 플랫폼 정부가 추구하는 가치다.

둘째, 풀어야 할 문제를 재정의해야 한다. 세상에는 쉽게 풀리지 않는 난제가 많다. 성차별 문제가 그 예다. 성차별이라는 용어 대신 ‘양성평등’ 또는 ‘성 역할 이해와 존중’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문제를 갈등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고 존중과 이해의 관점에서 정의하면 풀기 어려워 보이는 문제도 쉽게 풀리는 경우가 많다. 진짜 혁신적 정부가 되기 위해서는 기술 혁신 못지않게 ‘사고의 혁신’을 갖춰야 한다. 셋째, 탄탄한 통계적 분석을 통해 편파적 판단을 경계해야 한다. 세계경제포럼의 성격차 지수(Gender Gap Index)에서 한국은 세계 102위를 기록했다. 이 결과만 놓고 본다면 남녀 차별이 매우 심각한 것처럼 보이지만 유엔개발계획(UNDP)이 수행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성 불평등지수는 세계 11위로 선진국 수준이다.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들은 편향된 자료를 근거로 편파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다양한 관점에서 사회 현상을 바라보며 통계를 분석하면 보이지 않던 모습을 보게 된다.

2021년 공무원 5급 공채에서 여성 합격률은 40%에 가까웠다.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높아졌으며, 남성도 당당히 육아휴직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균형 잡힌 통계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줌으로써 선입견이나 독단적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새 정부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구성됐다. 국민을 위해 많은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유능한 정부가 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과연 정부가 진짜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인지를 자문(自問)할 줄 아는 겸손한 정부가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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