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일어나 힘든 시기에 좋은 음악을 만든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중략) 우리 모두 평화를 기원하며 모차르트의 ‘아베 베룸 코르푸스’를 연주하겠습니다.“
마시모 자네티 경기필하모닉 예술감독은 객석을 향해 이런 의미의 영어 육성 멘트를 한 후 다시 포디움에 섰습니다. 본 공연과는 사뭇 다른 엄숙한 표정과 동작으로 인류를 위한 예수의 수난을 기억하는 가사가 담긴 모테트를 지휘합니다. 현악 5부 오케스트라 편곡 버전으로 들려주는 합창 선율이 가슴을 파고듭니다. 전쟁 종식과 평화 기원의 마음으로 듣는 모차르트의 곡은 한층 숭고하게 다가옵니다. 3분 남짓한 짧은 연주이지만 모차르트 음악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연주가 끝나고 지휘자가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에 객석엔 적막한 고요가 흘렀습니다. 청중들도 다들 미동도 없이 음악의 여운을 곱씹는 듯했습니다. 지휘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움직임을 보이자 그제야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지난 2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경기필하모닉 마스터피스 시리즈 1 ‘슈만 교향곡 3번 & 4번’의 앙코르 무대는 공연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짜릿한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지휘자와 단원들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연주에 관객들이 한마음으로 반응했습니다. 공연 시작부터 차곡차곡 쌓인 무대와 객석의 긍정적인 교감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번 연주회는 지난해 7월 열린 ‘슈만 교향곡 1번 & 2번’에 이어 슈만 교향곡 전곡(1~4번) 전곡을 완주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원래 지난해 9월 열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영향으로 불발된 공연을 해를 넘겨서까지 되살려 하는 것이죠. 까다롭기로 정평이 난 슈만 교향곡 전곡을, 그것도 번호 순서대로 두 곡씩 연주한 전례가 국내에서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슈만 음악에 대한 자네티의 애정과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먼저 3번 E플랫 장조 ‘라인’입니다. 서주 없이 전체 악기가 강하게 연주하는 1주제가 경쾌합니다. 슈만 전체 교향곡 중 가장 유명하고 잘 알려진 주제여서 조금만 어긋나도 표가 나는데 한 치의 오차 없이 악상기호대로 생기 있게 흐릅니다. 자네티의 활기차고 역동적인 지휘 동작이 그런 느낌을 더해 줍니다. 쾌조의 스타트입니다. 호른 파트의 안정되고 균형감 있는 연주가 윤기를 더합니다.
2악장 초반 금관 파트가 잠시 흔들렸지만 자네티의 흔들림 없는 명쾌한 지휘에 곧 회복합니다. 민속 춤곡풍의 온화한 악장을 소박하게 이끌어갑니다. 자칫 지루하고 따분해질 수 있는 3, 4악장도 유려한 리듬으로 이어간 후 생기 넘치게 마지막 악장을 마무리합니다.
3번이 전체적으로 무난한, 모나지 않은 연주였다면 4번 연주에선 지휘자의 확실한 지향점과 개성이 느껴졌습니다. 연주 버전부터 그렇습니다. 4번은 여러모로 독특합니다. 슈만 교향곡 중 유일한 단조(d단조)이고, 각 악장이 음악적으로 이어지는 단악장의 ‘교향적 환상곡’(원래 부제) 느낌이 납니다.
작곡된 순서는 1번 ‘봄’에 이어 두 번째이지만, 초연(1841년) 당시 평이 좋지 않아 10년 뒤에 작곡가가 개작한 버전(1851년)으로 출판이 이뤄져 4번이 됐습니다. 초고는 브람스가 보관하고 있다가 1891년에야 그의 주도로 출판됩니다. 연주회장이나 음반 녹음에서 주로 개정판이 쓰이지만 자네티는 이번 공연에서 1841년 초연 버전을 연주했습니다.
이번에도 트롬본을 제외한 모든 악기가 같은 A음을 울리는 순간 완성도 높은 연주를 예감케 합니다. 자네티는 쉼 없이 이어지는 약 30분의 연주 시간 동안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활달하면서도 세세한 지시로 작품의 디테일을 살려냅니다. 2018년 9월 취임 이후 갈고 닦은 현악기군과의 호흡이 빛을 발합니다. 이날 공연에서 존재감이 두드러진 정하나 악장을 통로로 해서 지휘자와 현악기군이 보여준 일체감은 환상적이었습니다.
초연 버전은 개정판에 비해 ”더 투명하고 신선하고 실내악적 성격이 강하다“고 합니다. 확실히 금관 파트의 개입 빈도가 낮아 무게감이 덜한 느낌은 납니다. 이런 초연 버전의 보다 내밀한 특징과 고전적인 교향곡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우면서도 유기적으로 짜인 작품 자체의 매력이 환상적인 호흡과 세세한 디테일로 멋지게 살아났습니다.
좋은 음악을 함께 만들기 위한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열정과 노력을 느낄 수 있는 무대였습니다. 이런 점이 앙코르 공연의 취지에 대한 객석의 우호적인 감응을 끌어내는데 일조했다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아쉽게도 자네티는 오는 8월 말로 경기필하모닉 예술감독의 4년 임기를 마무리합니다. 경기필하모닉과 함께하는 연주회는 다음 달 3일과 5일 ‘드뷔시 & 레스피기’와 오는 7월 베르디 ’레퀴엠‘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