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 산업이 전방위적 위기에 직면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메모리반도체 성공 신화에서 벗어나 팹리스(Fabless·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 파운드리(Foundry·반도체 위탁생산) 등 향후 성장성이 높은 분야에 집중 투자 및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의견이 힘을 받고 있다.
전 세계 상위 10개 팹리스에 한국 기업 전무
2일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전세계 상위 10개 팹리스의 매출액은 총 1274억달러(한화 약 155조원)로 전년 대비 48% 증가해 전체 반도체 시장 중 가장 높은 증가율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반도체 부족으로 칩 가격이 급등하면서 이를 설계하는 팹리스 매출이 크게 늘어나서다.팹리스를 주도하는 미국과 대만은 큰 수혜를 봤지만 메모리반도체 위주인 한국은 이 분야 훈풍을 받지 못했다. 매출액 기준 1위인 퀄컴의 지난해 반도체 설계 매출은 293억3300만달러(약 35조6000억원)로 전년 대비 51% 증가했다. 스마트폰 시스템온칩(SoC) 매출이 51%, 사물인터넷(IoT) 칩 매출이 63% 늘면서 실적을 견인했다.
매출 2위인 엔비디아(248억8500만달러·30조26000억)는 게임용 그래픽 카드와 데이터 센터 부문 매출이 각각 64%, 59% 증가하면서 전체 매출이 전년보다 61% 뛰었다. 3위인 브로드컴(210억2600만달러·25조6000억원) 매출도 18% 증가했고 6위인 노바텍(48억3600만달러·5조9000억원) 매출은 79%나 증가해 10대 기업 중 가장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대만 기업들의 약진도 돋보였다. 4위인 미디어텍은 176억1900만달러(21조4000억원)를 벌어들여 증가율이 61%에 달했고, 10위권 안에 든 노바텍(79%), 리얼텍(43%), 하이맥스(74%)도 기록적인 증가율을 보였다.
지난해 전 세계에서 100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린 17개 반도체 기업 중 전년 대비 매출이 50% 이상 증가한 4곳 모두 팹리스(퀄컴·엔비디아·미디어텍·AMD)다. 또 10대 팹리스 기업 중 퀄컴·엔비디아·브로드컴·AMD·마벨·자일링스 등 6곳은 미국 기업이며 미디어텍·노바텍·리얼텍·하이맥스 등 4곳은 대만 기업이다.
트렌드포스는 "고성능 컴퓨팅과 네트워크 커뮤니케이션, 고속전송, 서버, 자동차, 산업용 애플리케이션 등 높은 스펙의 제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팹리스 기업들에게 좋은 비즈니스 기회가 창출돼 전반적으로 수익이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팹리스의 48%라는 매출 증가율은 다른 반도체 시장보다 크게 높은 수준이다. 시장조사기관 옴디아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반도체 시장의 전년 대비 매출 증가률은 21.1%를 기록했지만 팹리스와 비교하면 절반에 그쳤다.
반면 국내 기업들의 팹리스 경쟁력은 처참한 수준이다. 옴디아에 따르면 전 세계 팹리스 시장에서 한국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5%로 미국(56.8%)·대만(20.7%)에 크게 못 미치며 중국(16.7%)과도 격차가 크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을 통해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고 있지만 팹리스에서는 유독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고가이면서도 향후 유망한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등 고성능 반도체칩의 설계는 퀄컴 등 미국 기업이 독식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반도체 생산에만 치중…종합 생태계 구축 필요
한국 팹리스 기업들은 대부분 중소기업들로 현재 성장이 정체돼 있는 분위기다. 팹리스는 파운드리 기업과의 협력이 필수적이지만 전 세계적인 반도체 호황 분위기 속에 톱10 파운드리 기업들에 팹리스들의 주문이 몰리면서 규모가 작은 한국 팹리스는 갈수록 설 곳이 없어지고 있다.이 같은 구조는 장기적으로 한국 반도체 산업 육성에도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이다. 통상 팹리스 기업이 반도체를 설계한 뒤 파운드리에 생산을 맡기고 이후 정보기술(IT)·완성차 업체 등 고객사에 납품하는 구조인데 세계 각국이 설계-소재-장비-생산으로 연결되는 반도체 생태계 구축에 나서면서 생산에만 비중이 치중된 한국은 상대적으로 경쟁이 불리해졌다는 평가다.
대만 반도체 업계가 설계에서부터 파운드리, 후공정에 이르기까지 내부 연계를 강화하는 사이 미국도 인텔이 파운드리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설계에 강한 미국 업체들과의 시너지가 예상되고 있는 상황. 시장에서는 세계 팹리스 시장을 꽉 잡고 있는 미국 기업들이 인텔 파운드리에 몰아주기를 할 경우 대만 TSMC보다 수율(양품 비율)이 떨어지는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큰 위기에 직면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최근 삼성전자가 TSMC에 연일 물량을 뺏기면서 위기의 조짐은 벌써부터 나타나는 양상이다. 엔비디아가 발주한 데이터센터용 핵심 칩(H100 GPU) 수주에 실패한 데 이어 소비자용 그래픽카드(GPU) 칩도 TSMC에 고배를 마셨다는 보도가 이어지는 중이다. 특히 이전 모델의 GPU는 삼성전자가 위탁생산해 왔다는 점에서 위기감의 무게가 다르다.
반도체 굴기를 꿈꾸는 중국은 정부 주도로 독자적인 반도체 생태계 구축에 시동을 걸었다. 하이실리콘(팹리스)·SMIC(파운드리)·YMTC(낸드플래시) 같은 기업을 주축으로, 최근에는 반도체 장비 회사 키우기에 고삐는 죄는 중이다. 중국은 2014년 24조원 규모 국가반도체 산업투자 기금을 조성했고 2019년에는 36조원의 기금을 추가로 투입했다. 중국은 첨단 기술을 보유한 반도체 기업에 대해 25%에 달하는 법인세를 10년간 면제하고 수입장비 관세를 면제하기로 했다.
"정부 차원에서 의지 갖고 육성해야"
국내 상황은 어떨까. 지난달 23일 삼성전자에서 시스템반도체 설계·개발을 담당하는 시스템LSI 사업부의 박용인 총괄 사장이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DS) 직원들과의 소통을 하며 팹리스의 중요성을 언급했다.박 사장은 "AP, 모뎀, 이미지센서 등 사물과 기계의 지능화를 통한 초연결·초지능이 필요한 다양한 솔루션을 보유한 회사는 시스템LSI 사업부가 유일하다"며 "인간을 이롭게 하는 반도체, 사람을 살리는 반도체를 만들어 가겠다"고 강조했다. 메모리반도체에 이어 '시스템반도체 1위'라는 삼성전자의 목표를 재차 분명히 한 것으로 읽힌다.
그러면서 팹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시스템LSI 사업은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동일하다"며 "부서원이 아이디어가 있고 구현할 역량이 있으면 어느 영역에서든 성과를 낼 수 있고, 그렇기에 시스템LSI 사업부는 사람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 1월 AI반도체 '사피온'의 로드맵을 공개하며 팹리스에 출사표를 던진 SK하이닉스는 ARM의 인수·합병(M&A)을 타진 중이다. 영국 최대 팹리스인 ARM은 삼성전자·애플·퀄컴 등이 판매하는 정보통신기술(ICT) 기기의 AP 설계 기술을 갖고 있다. 현재 전 세계 모바일 기기의 약 95%가 ARM의 기술을 채택하고 있다.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 지난달 30일 제74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ARM 인수를 다른 기업과 컨소시엄을 이뤄 투자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달 28일 SK스퀘어 주주총회에서도 "반도체 업체는 규모가 큰 곳부터 작은 곳까지 M&A 계획을 검토하고 있으며 (인수 대상으로) ARM까지 고려 중"이라며 "팬데믹으로 인한 출장 제한이 완화되면 4월부터라도 실리콘밸리 등에서 협의를 이어나갈 것"이라며 팹리스 육성을 의지를 드러냈다.
업계 관계자는 "최첨단 공정인 3나노 반도체 설계가 가능한 기업으로는 삼성전자, 퀄컴, 애플, 엔비디아, AMD 등이 꼽힌다"라며 "하나같이 자본력이 막강한 공룡 기업들이기 때문에 사실상 정부가 의지를 갖고 투자를 하지 않으면 중소 팹리스 생태계 조성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한국이 반도체 강국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국가가 직접 나서야 한다"며 "미국, 유럽, 대만, 중국, 일본 모두 국가가 중심이 돼 팹리스, 파운드리, 장비·소재 등 반도체 분야를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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