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4월 06일 10:27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투자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윤리투자라는 전통의 끝자락에 있다. 공동의 선에 부합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도리를 의미하는 '윤리'와 수익을 추구하는 이기적 행위인 '투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수익을 추구하는 중에도 선한 가치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투자자의 머릿속에서 떠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사회책임투자, 지속가능투자, 임팩트투자 등 지금 유행하는 ESG투자와 맥락을 같이 하는 여러 움직임은 자본시장과 역사를 함께 해왔다.
윤리는 투자와 또 다른 측면에서도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자본시장이 성장함에 따라 고객의 돈을 대신 관리해주는 금융서비스가 발전해 왔는데, 그러한 일을 하는 전문가에게 요구되는 직무윤리가 바로 그것이다. 모든 직업에는 직무윤리가 있고, 전문성이 강한 직업에는 더 강한 직무윤리가 요구된다. 신뢰를 밑천으로 하는 금융산업의 직무윤리는 그중에서도 엄격한 편에 속한다. 투자자문, 투자일임, 자산운용 등 민간부문의 전문가에서부터 국민연금, 사학연금, 공무원연금 등 공공부문의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해당하는 이야기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두 가지 윤리 즉, 선한 가치를 추구하는 윤리투자와 금융서비스 전문가의 직무윤리 간에 상충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충이 오랜 기간 자본시장이 ESG투자를 외면한 이유 혹은 핑계가 되어왔다. 다 같은 윤리인데, 왜 상충하는 것일까?
고객의 자금을 대신 관리하는 전문가에게 요구되는 직업윤리는 신인의무(Fiduciary Duty)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신인의무란 타인을 위해 일하는 수탁자가 일을 맡긴 타인 즉 위탁자에 대해 갖는 의무를 말한다. 신인의무는 영미권의 신탁 법리에서 발전한 개념으로서, 수탁자가 위탁자를 위해 선량한 관리자로서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선관주의의무 또는 주의의무(Duty of Care)와 수탁자는 자신이 아닌 위탁자의 이익에 전념해야 한다는 충실의무(Duty of Loyalty)로 구성된다. 즉 금융서비스 전문가는 고객의 목적인 재무적 수익에 전념해야 하고, 이를 위해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국가에서 금융산업의 신인의무는 법제화되어 있고, 금융기관 또한 스스로 윤리강령(Code of Ethics)과 행위기준(Standards of Professional Conduct)을 제정하여 자율적인 규제를 하고 있다.
이제 윤리투자가 왜 금융서비스 전문가의 직무윤리와 상충하는지 알 만하다. 이러한 질문을 해보자. "금융기관이 고객의 자금으로 선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신인의무에 위배되지 않는가?" 고객의 목적이 재무적 수익이고, 선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수익의 감소를 초래한다면 답은 당연히 "그렇다"이다. 이러한 공식은 윤리투자의 오랜 역사동안 계속 적용되었고, 지금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1960년대 시민사회의 성장과 함께 유행한 사회책임투자, 1980년대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과 함께 확산된 지속가능투자, 2000년대 사회적 기업을 대상으로 널리 퍼진 임팩트투자가 자본시장의 주류가 되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윤리적인 이유로 윤리적인 투자를 할 수 없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최근 ESG투자라는 용어가 유행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이러한 공식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즉 재무적 수익과 환경적, 사회적 가치가 상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법률적 측변에서도 ESG 요소를 고려하는 것이 고객에 대한 신인의무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고, 재무적 측면에서도 ESG투자의 성과가 우수하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고 있다. 여기에는 정부의 규제와 지원, 기술과 산업의 발전, 고객의 가치 변화 등이 ESG 지향적인 기업이나 실물자산의 성과를 우수하게 만든다는 판단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PRI(Principles for Responsible Investment), UNEP FI(UN Environment Programme Finance Initiative), 제너레이션재단(Generation Foundation) 등 여러 단체가 협력하여 2015년부터 2019년까지 발간한 '21세기의 신인의무'라는 일련의 보고서로부터 큰 힘을 얻었다. 이 보고서는 ESG경영과 관련된 여건의 변화로 인해 ESG투자를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투자자의 이해에 부합하며, 나아가서 ESG투자를 외면하는 것이 금융기관으로서 신인의무를 저버리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최근에는 신인의무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제도에도 반영되고 있다. 미국에서 퇴직연금을 담당하는 노동부(Department of Labor)가 2015년 내놓은 가이드라인이 대표적인 사례다. 노동부는 퇴직연금이 투자할 수 있는 대상인 ETI(Economically Targeted Investments)를 '투자수익 이상의 편익을 고려한 투자'라고 정의함으로써, 퇴직연금의 운용자가 투자의사결정 과정에서 재무적 수익뿐 아니라 ESG요소를 함께 고려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또한 영국에서 퇴직연금을 담당하는 연금감독기구(Pension Regulator)는 가이드라인에서 보다 분명하게 ESG를 고려하는 것이 신인의무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ESG투자의 유행은 최근의 일이므로, 그것이 실제로 재무적 수익에 기여하는지는 좀 더 두고 보며 판단할 일이다. 하지만 ESG투자의 제도화가 여러 국가로 확산되고 있으며, 그 결과 더 많은 자본시장이 신인의무의 짐을 벗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금융서비스 전문가는 국내에서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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