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져 있던 진도(珍島)의 진짜 이야기

입력 2022-04-04 06:00   수정 2022-04-04 18:24

때를 맞춰 여행하기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같은 남도의 명승지라도 동백이 뚝뚝 떨어지는 초봄과 백설기처럼 포슬포슬한 눈에 파묻혀 있을 때의 모습을 똑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매일을 셈하면 까마득하게 많아 보이는 게 남은 날이지만, 사계절로 인생을 셈하니, 생각해 보다 난감해지고 맙니다. 그러니 어서 서둘러야 합니다. 성큼 다가온 봄을 국토 최서남단의 섬, 진도에서 맞았습니다.
운림산방에 먼저 찾아온 봄
진도는 ‘휴(休)의 섬’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주, 거제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섬이고, 진도대교로 육지에 연결(1984년)된 지 벌써 38년인데도 외딴섬처럼 조용하다. 카페의 숫자가 관광 활성화의 척도라고 한다면, 진도는 확실히 ‘관광 오지’다. 석양이 아름다운 북서쪽 해안도로조차 카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진도의 경승지를 소개한 푯말에 2019년 개장한 대명 쏠비치진도가 포함돼 있을 정도다. 그나마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왜(倭)를 격파한 격전의 현장인 명량과 가수 송가인 덕분에 인지도가 올라가긴 했어도 진도의 진짜 이야기를 아는 이들은 드물다. 진도(珍島)는 이름처럼 숨겨진 보석과 같은 곳이다.



진도의 봄은 첨찰산 아래 운림산방에 가장 먼저 찾아온다. 소치 허련의 3대손인 남농 허건이 1982년 할아버지의 생가를 복원한 곳이다. 한국 남종화의 성지이자, 호남 화맥의 뿌리로 불린다. 남농은 조부가 말년의 삶을 보낸 초가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그 앞에 정면 5칸짜리 맞배지붕의 정갈한 한옥을 지어 자신이 기거했다. 집 앞에는 오각형의 연못을 만든 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원리대로 못 한가운데에 작은 섬을 두고 그 위에 배롱나무를 심었다. 진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해발 485m의 첨찰산 봉우리를 차경 삼아 살포시 앉아 있는 운림산방은 일지매(一枝梅)를 비롯해 백일홍, 목련 같은 봄꽃을 감상하기에 제격이다.

운림산방을 방문한 날, 때마침 제2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우연은 반갑기 그지없다. 마치 연극이 끝난 뒤, 무대 뒤 조용한 배우들의 대기실을 들여다본 느낌이었다. 아마도 이날 오전엔 진도 군수를 비롯해 지방 유지를 자처하는 이들이 기념관 앞에서 의미 없는 덕담을 나누고, 기념 촬영을 한 뒤 총총히 제 갈 길을 갔을 터다. 제2기념관은 소치에서 시작해 5대까지 이어진 허씨 일가의 화맥을 한데 모은 곳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유일한 장소가 아닐까 싶다. 기존 기념관은 소치의 시·서·화만 오롯이 감상할 수 있도록 재단장하고, 2대 미산 허형, 3대 남농 허건, 임인 허림, 현존 작가인 4대 임전 허문과 5대 오당 허진 등의 한국화 수작을 신축 기념관에 모아놨다. 정통 조선 남종화에서부터 5대 허씨 화원의 현대 작품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감상했다. 특히 제2기념관엔 미디어 아트를 구현한 공간이 크게 마련돼 있어 눈길을 끌었다. 소치 5대 일가가 그린 모란, 매화, 대나무 등을 디지털 이미지로 화려하게 재현한 작품이다. 화면에 손을 대면 꽃잎이 봄비처럼 공중으로 우수수 흩날린다.

소치 허련은 추사 김정희를 비롯해 다산 정약용의 제자인 초의 선사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추사가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고 극찬했지만, 진도 변방의 몰락한 명문가 출신인 소치는 끊임없이 중앙 화단에 입성하려고 애썼다. 몇 안 되는 소치 연구자들에 따르면 “허련이 당시 주요 유배지의 하나인 진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의 인격·의식 형성은 물론 인생 전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김정희와 같은 대학자의 높은 평가는 한없는 자부심이 되었고…중앙 화단에의 집착은 그의 주유 경로가 오직 서울과 그의 고향인 진도, 한때 그가 살았던 전주와 서울을 왕래하는 것만으로도 극명히 드러난다”. 기록에 의하면 진도의 명주로 꼽히는 홍주는 허련 집안의 가주였다고 한다. 연산군 시절 폐비 윤씨 사건을 둘러싸고 사림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피해 허씨 가문이 진도로 이주하면서 지역주로 정착했다는 설(說)이 전해진다.
잔잔한 호수처럼 소박한 진도의 바다
진도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도 꼽힌다. 그중에서도 섬 북서쪽 해안 일주도로가 압권이다. 일몰 풍경이 아름다워 아예 세방낙조라는 고유 명사를 부여받은 세방에서 시작해 쉬미항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저녁 무렵 달리면 한국의 미(美)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된다. 흔히 백제 건축물에 수식어처럼 쓰이는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의 경지가 진도의 자연에도 딱 들어맞는다. 해안가 경승지라면 으레 있을 법한 카페나 화려한 리조트, 펜션조차 없어 인공미 없는 자연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 해안 일주뿐만 아니라 진도 내륙 곳곳을 누비는 맛도 색다르다. 훈풍이 부는 이맘때 창을 열고 홀로 드라이브를 해보자. 창 너머로 상록수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마치 파도 소리를 연상시킨다. 사이다처럼 시원한 동해와 달리 잔잔한 호수처럼 소박한 진도의 바다와 닮았다. 이번 여행길에 미처 가보지는 못했지만, 운림산방 바로 위 첨찰산 쌍계사 상록수림은 잎 넓은 나무들이 울창한 우리나라에서도 몇 안 되는 숲길이다.



관광 오지이던 진도는 2019년 7월 대명 쏠비치진도가 섬 남동쪽에 개장하면서 전국에서도 ‘핫’한 명소로 부상했다. 총 576실의 대규모 리조트로 진도군청에서 공식으로 진도 명승지로 선정했을 정도로 주변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진도는 물론이고, 전라남도 전역에서 이만한 고급 휴양 시설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지역민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지난해 평균 투숙률이 85%에 달했다고 한다. 쏠비치진도는 ‘신비한 바닷길’을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진도 신비의 바닷길은 1년에 3, 4월 한두 차례 바닷물이 갈라지고 육지가 드러나는 가계해변을 말한다. 국가지정 명승 제9호로도 지정된 이곳은 1975년 주한 프랑스 대사 피에르 랑디가 진도로 관광을 왔다가 이 현상을 목격하고 이름을 붙이면서 유명해졌다. 쏠비치진도와 인근 소삼도를 잇는 바닷길은 가계 바닷길의 축소판이다. 매일 바닷길이 열리는 데다 아담한 소삼도의 트래킹 길의 매력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다.


진도는 역사 여행으로도 제격이다. 해남과 진도를 잇는 진도대교를 경계로 옛 우수영 터에서부터 명량해전의 현장인 울돌목과 벽파진을 답사하다 보면 먼 옛날 진도 군민과 장졸들이 겪었을 고난의 기억에 절로 머리를 숙이게 된다. 소설과 영화로만 알았던 역사를 현장에서 직접 보는 맛 또한 별미다. 이야기로만 알던 역사에 지리적 공간을 합치니 스토리의 풍성함이 불현듯 되살아난다. 벽파진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은 왜선을 좁은 물길로 불러들이기 위해 몇 차례 유인책을 펼치다 어느 날 울돌목을 지나 우수영으로 진을 옮겨 결전을 치른다. 진도타워 위에서 사방팔방 급물살을 이루며 흐르는 울돌목의 물살을 볼 수 있다.
별미, 쏠비치진도 인근의 뻘낙지와 전복
삼별초의 역사를 만나볼 수 있던 것도 이번 진도 기행의 큰 수확이다. 배중손 등 삼별초의 장군들은 군민 1만여 명을 배에 태워 진도에 산성을 쌓고 궁을 지었다. 그 터가 용장성이다. 계단식으로 견고하게 석축을 만들고 행궁을 지었다. 고려 무인정권의 강화도 임시 수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규모가 웅장하다. 여몽 연합군에 끝까지 결사 항전하던 삼별초는 진도에서 제주로 건너가 마지막 전쟁을 벌였지만, 진도에 있던 대부분의 군민은 전쟁터의 화살받이로 죽임을 당하거나 몽골로 끌려갔다고 한다.

이 시절의 슬픈 역사를 알려주는 장소가 하나 있다. 삼별초궁녀둠벙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인데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승화후 온(溫)이 몽골군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자, 그를 따르던 궁녀와 부하들이 고갯길을 넘어 도망치다 끝내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장소다. 백제가 망할 당시 3천 궁녀가 낙화암에서 몸을 던졌다는 설화와 비슷하다. 차를 도로에 세워두고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여기가 맞나 싶을 만큼 작은 저수지 하나가 나온다. 예전엔 훨씬 넓었을 둠벙의 수심은 바다와 연결돼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깊다고 한다. 슬픈 이야기가 오랫동안 구전된 탓에 이곳은 불과 20여 년 전까지 사람이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비가 오는 밤이면 어김없이 여인들의 슬픈 울음소리가 들렸다니, 담력을 시험할 젊은 청춘들 아니면 찾아갈 엄두를 내기 힘든 곳이다. 게다가 둠벙 위로 을씨년스럽게 폐가까지 남아 있어 생각하기에 따라선 등골이 오싹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사람이 만들고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인적이 드물어서인지, 둠벙 인근 사방으로 동백이 지천이고, 붉은빛이 더 선명한 듯하다.



삼별초 항쟁 이후 진도는 사실상 버려진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임회, 지산면의 경계 지대에 군마 사육장이 설치되기도 했으나 고려 말기에 왜구의 잦은 침입에 시달리다 1350년엔 아예 진도 모든 주민은 영암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다. 공도화를 겪어야 했던 진도에 다시 주민이 살기 시작한 것은 세종 때부터다. 북진과 함께 왜구 격퇴에도 적극적이었던 세종은 진도 남서쪽에 옛 삼별초가 쌓았던 남도석성을 개축해 왜구의 침입을 막을 요충지로 삼았다. 요즘 명칭은 남도진성이다.



여행에 먹거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진도 하면 떠오르는 ‘시그니처 푸드’를 찾기 어렵다. 인구 3만명 남짓한 소도시에서 대부분의 군민들이 자급자족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관광객 넘쳐나는 다른 여행지와 비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사실 진도는 완도 못지않게 전복 양식을 많이 하는 고장이다. 탱글탱글한 식감은 완도산을 웃돈다는 게 진도 사람들의 자부심이다. 쏠비치진주 인근 개펄에서 나오는 낙지도 일품이다. 하지만 진도 낙지 역시 무안 뻘낙지에 비하면 명성이 처진다. 진도읍에선 육사시미와 육회비빔밥을 제대로 하는 맛집이 동네 사람들만 아는 곳으로 꼭꼭 숨겨져 있다. 매일 아침 식자재를 공수해 직접 요리해 낸다. 접시를 통째로 뒤집어도 떨어지지 않을 만큼 찰진 육사시미에 신선한 백김치를 곁들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진도=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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