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장관은 권력 무상의 비애를 느끼는 듯하다. 출퇴근길에 기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폭탄’을 쏟아내던 박 장관이 어제는 “그냥 좀 내버려둬 달라”며 함구한 장면에서 회한이 잘 묻어난다. 하지만 정작 말문이 막히고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은 ‘법치’보다 ‘정치’를 앞세운 장관과 그런 장관의 도우미를 자처해 온 친정권 검사들의 표변을 지켜본 국민이다.
이번 해프닝에서 박 장관의 폭주를 저지한 주역은 다름 아닌 법무부 소속 검사들이다. 법무부에는 검찰에서 파견 나온 ‘친정부 성향’ 검사로 구성된 핵심 조직인 검찰국이 있고, 박 장관의 수사지휘권 관련 지시도 검찰국에 하달됐다. 하지만 “직권남용에 해당할 수 있다”며 검찰국 검사들이 이례적으로 제동을 걸고 나서자 박 장관도 두손을 들고 말았다.
5년 내내 정권 편에서 충성하던 검찰국 검사들이 연출한 ‘깜짝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엘리트 검사들이 모시던 상관의 마지막 승부수를 좌절시키면서까지 새 권력의 심기를 살핀 장면은 냉혹한 권력의 속성, 그에 복종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지적이 나온다.
검사들의 태도 변화는 이것만이 아니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이 대법원에서 최종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판박이인 ‘산업부 블랙리스트’ 수사는 이제서야 본격화됐다. 삼성웰스토리에 대한 갑작스러운 압수수색도 마찬가지다. 이들 수사는 모두 ‘친정부 성향’으로 분류된 검사들이 주도하고 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을 연상시키는 일이 검찰에서만 목격되는 것도 아니다. 5년 내내 정권 입맛을 맞춘 결과를 내놓던 감사원의 유턴행보도 뚜렷하다. 감사원은 주택·일자리 등 이 정부의 주요 통계 전반에 대한 특별감사를 준비하고 있다. 집값 시세 괴리는 ‘적은 표본 탓’이고, 일자리는 ‘코로나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는 정부 강변의 근거가 된 통계와 정책의 타당성을 뒤늦게 문제 삼고 나선 것이다.
새로 등장한 정권의 눈치를 살피며 캐비닛 속 파일을 꺼내든 권력기관들의 행태는 갈 길 먼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다. 하지만 권력의 위세가 다하면 감춰진 부정과 비리를 어김없이 들춰내 단죄하는 것이 세상사다. 대장동 사건으로 불거진 ‘권순일 재판거래 의혹’처럼 사법 독립을 위협한 법원 주변의 여러 스캔들도 이런 이치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새로 권력을 잡은 사람들도 권력의 유한함과 세상 인심의 엄정함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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