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유엔의 종말?

입력 2022-04-07 17:24   수정 2022-04-08 00:13

미국 뉴욕의 유엔 본부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실 바깥벽에는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태피스트리(색실로 짜 넣어 그림으로 표현)로 만든 작품이 걸려 있다. 게르니카는 1937년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의 게르니카 폭격으로 수천 명이 사망한 참상을 그린 것이다. 유엔이 이를 교훈 삼아 세계 평화 유지를 위해 제 역할을 해달라는 뜻에서 미국 록펠러 가문이 장기 대여했다.

그러나 유엔이 제 기능을 못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유엔은 1945년 ‘국제 평화를 위협하는 침략과 파괴를 진압하기 위해 집단적 조치를 취한다’(헌장 1장 1조)를 내걸고 출범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 참전을 제외하고 대규모 국제 분쟁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왔다. 6·25 참전도 당시 소련이 중화민국(대만) 대신 중공(중국)의 유엔 대표권을 인정해야 한다며 그해 1월부터 안보리 회의에 불참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법적 구속력을 갖는 유엔의 결정은 안보리 상임이사국(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중 하나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기각된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다른 사안은 애초부터 일치된 결론을 내놓는 게 불가능하다. 1950년대 말 소련군이 헝가리 등 동유럽의 반소(反蘇) 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해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을 때도 유엔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지난해 미얀마 군부 쿠데타로 1700명 이상 민간인이 살해됐는데도 군부에 우호적인 중·러의 반대로 규탄 성명도 못 냈다. 시리아 내전으로 50만여 명이 숨졌지만, 러시아가 시리아 정부를 두둔해 유엔의 관심권 밖이 됐다.

북한이 올 들어 연이어 탄도미사일을 쏘며 유엔 결의를 밥 먹듯 위반하고 있지만, 역시 중·러의 반대로 규탄 결의안은커녕 성명 하나 못 내고 있다. 유엔이 분쟁지역에 평화유지군을 보내는 것도 중·러와 이해관계가 없는 곳이라야 가능하다. AFP통신은 “유엔은 자연재해나 전쟁이 났을 때 인도주의 지원을 하는 기구로 격하됐다”고 혹평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그제 유엔 화상연설에서 “러시아의 민간인 대량 학살이 자행된 (우크라이나) 부차에 안보리가 보장해야 할 안보는 없었다”고 정곡을 찔렀다. 회의장은 숙연했지만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지금의 ‘식물 유엔’은 게르니카, 우크라이나와 같은 비극을 막을 방도가 없다. 탄생 77년을 맞은 유엔이 기로에 서 있다.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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