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총수지정제 변경이나 혈족 범위 조정에 앞서 근본적으로 손봐야 할 것이 있다. 총수 규제의 원천인 대기업집단 지정제다. 공정거래법상 자산총액 5조원 이상 기업은 공시대상기업집단이 된다. 계열사 간 거래와 특수관계인이 보유한 기업, 주식 현황 등을 신고해야 한다. 일감몰아주기 규제도 받는다. 최대 67개 규제를 새로 받게 돼 총 규제 수가 217개로 늘어난다.
자산 10조원을 넘겨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 지정되면 더 촘촘한 규제 그물망에 갇히고 만다. 계열사 간 상호출자 및 신규 순환출자, 채무보증이 금지되는 등 58개 규제가 추가된다. 지난해 기준 자산 5조원 이상 기업은 71개, 이 중 10조원 이상은 40개다. 네이버 셀트리온 등 정보기술(IT)·바이오 기업 7곳은 새로 대기업집단이 됐다. 벤처로 시작해 대기업 반열에 오른 네이버는 계열사 공시 누락 혐의로 공정위로부터 고발당하기도 했다. 공정위는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가 20개 계열사 정보를 누락했다며 2020년 2월 검찰에 고발했지만, 한 달만에 무혐의 처리됐다.
‘경제력 집중 억제’를 내세운 정부가 대기업집단 지정제를 도입한 때는 1986년이다. 당시엔 어느 정도 당위성이 있었다. 30대 그룹 매출 비중이 전체 제조업의 40%를 넘나들고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도 상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경제가 100% 개방된 현재 여건에서 보면 경제력 집중도는 크게 완화됐고 당국의 엄격한 규제와 주주들의 감시로 총수들의 전횡도 눈에 띄게 사라졌다. 또 대기업 매출의 상당액은 해외에서 벌어들인 것이다. 2020년 기준 10대 기업의 해외 매출 비중은 64%에 달했다. 더욱이 대기업집단 지정제가 아니더라도 총수의 사익편취를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은 많다. 배임·횡령죄 외에 공정거래법상 부당지원행위 처벌조항도 있다.
삼성과 현대차는 애플 도요타 테슬라 등 해외 거대기업들과 생사를 건 경쟁을 하고 있다. 그런데 기업집단으로 당국의 규제를 받는 곳은 한국 기업들이 유일하다. 상대는 팔다리가 자유로운데, 우리 기업들만 수갑과 족쇄를 찬 채 골병이 들고 있다. 덩치가 커졌다는 이유만으로 기업을 규제하는 구시대적인 제도는 이제 끝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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