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스마트폰, 우산, 안경, 신발…. 우리가 매일 만나는 지극히 평범한 물건들이다. 너무 흔해 눈길조차 가지 않는 사물들도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을까.
영국 현대미술의 거장이자 ‘개념 미술’(완성한 작품보다 아이디어와 과정을 중시하는 현대미술의 한 조류)의 선구자인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82)의 손을 거치면 일상의 오브제들은 대담하고 아름다운 작품이 된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방아쇠가 되기도 한다.
크레이그 마틴은 8일부터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세계 최초, 최대 규모 원화전 《히어 앤 나우》를 연다. 1970년대에 만든 작품부터 올해 완성한 작품까지 150점을 들고 왔다. 7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특별하지 않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나의 작업처럼, 모든 관람객이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크레이그 마틴은 개념미술의 1세대 작가다. 1970년대부터 검고 선명한 윤곽선과 대담한 색으로 면을 채우며 원근법을 무시한 구도를 만들어냈다. 다채로운 색상과 대형 조각이 ‘크레이그 마틴식 회화’의 트레이드 마크다. 대량생산된 공산품을 소재로 삼아 평범하지 않은 색채로 그리면 완전히 새로운 회화적 즐거움을 주는 작품이 된다. 그는 이 과정을 “기적과도 같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은 아시아 최초로 공개하는 ‘참나무’(1973년)다. 개념미술의 상징적 작품이 됐다. 작품명은 참나무지만, 유리 선반 위에 물컵만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 작품을 그릴 때 크레이그 마틴은 예술의 본질에 관심이 많았다. 유리잔에 물을 붓고 관람객에게 ‘참나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그는 “절대적인 작품을 하고자 했다”며 “내가 관람객에게 던지는 건 10%, 나머지 90%는 그들의 상상력에 맡긴다”고 했다.
그는 무언가를 보면서 상상을 해보고 질문을 던지며 또 다른 상상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각각의 경험이 예술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참나무라는 절대적 작품을 끝내자 어떤 작품도 할 수 있게 됐다”며 “1970년대 후반에는 태초의 인간이 그린 동굴벽화처럼 벽화 작업에 매진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6개 테마로 구성했다. 탐구, 언어, 보통, 놀이, 경계, 결합 등 그가 펼쳐온 미술 세계를 자세히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이번 전시는 개최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코로나19 탓에 수십 차례에 걸친 비대면 줌 회의로 이견을 조율해야 했다. 알루미늄판에 아크릴로 그린 대형 회화 작품이 많아 운송, 해체, 설치에 많은 돈과 시간이 들었다. 그는 “줌이 만들어준 전시회나 다름없다”며 “한국 관람객들이 나의 작품에 가장 열정적인 사랑을 보내줘 서울에서 역대 최대 규모 전시회를 열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영국을 ‘문화 강국’으로 만든 버팀목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에서 자라 예일대를 졸업했지만 1970~1980년대 영국 예술계를 위해 헌신했다. 런던 골드스미스대 교수로 재직하며 데이미언 허스트, 세라 루커스, 트레이시 에민, 게리 흄 등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yBa: young British artists)’를 양성했다. 그 공로로 2016년 기사 작위도 받았다.
크레이그 마틴은 “영국 예술을 강하게 만든 건 다양성”이라며 “나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나처럼 하지 말라, 너의 길을 가라’는 것을 제1 원칙으로 삼는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예술도 삶도 우리 각자가 갖고 있는 다양한 개성을 발견하고 성장시켜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머리가 성성한 80대 거장은 멈추는 법이 없다. 이번 전시에도 영상 작품, 벽화 페인팅 등 특별한 볼거리를 만들었다. 전시는 오는 8월 28일까지.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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