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태 이후 세계 증시는 칼날 위를 걷는 불안한 상황이 지속돼 왔다. ‘해로드-도마의 칼날 이론’은 실제성장률과 균형성장률, 잠재성장률이 같은 상태를 뜻하는 황금률이 유지돼야 지속 성장이 가능하다고 봤다. 동일한 이치로 주가가 상승하기 위해서는 자금 면에서 ‘유동성’, 매크로(거시경제) 면에서 ‘경기’, 마이크로(미시경제) 면에서 ‘기업 실적’이 받쳐줘야 한다는 의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까지 국제 유가가 상승하는데도 증시에 미치는 충격이 작았던 것은 고유가와 금리 인상이 겹친 2차 오일쇼크 당시와 달리 각국 중앙은행의 금융완화로 유동성이 오히려 늘어났기 때문이다. 경기 측면에서도 지난해 세계 경제 성장률이 5%가 넘은 데다 기업 실적도 매 분기 예상치를 뛰어넘는 어닝서프라이즈가 지속됐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가(브렌트유 기준)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서면서 이런 황금률이 깨지자 원유 공급국과 수요국 모두에 부담이 되고 있다. 유가 상승을 놓고 ‘3차 원유 전쟁’에 비유될 만큼 미국과 러시아 간에 벌어지는 책임 공방이 대표적인 예다. 원유 수요국을 중심으로 유가를 안정시키기 위한 국제협상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가별로는 인플레이션 문제가 최대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동안 느긋한 입장을 보이던 미국이 인플레이션 압력을 줄이기 위해 급진적인 출구전략과 강(强)달러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유럽도 테이퍼링(자산매입 축소)을 조기에 끝내고 금리를 올려 유로화 방어에 나설 태세다. 아시아 국가들도 금리 인상과 외환시장 개입을 통해 통화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마디로 자국 통화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한 일종의 환율전쟁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다. 종전에는 수출 확대와 경기 부양을 위해 자국 통화가치를 경쟁적으로 끌어내리려는 환율전쟁이 보편화됐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다른 가격변수와 달리 환율은 국별 통화 간 상대가격이기 때문에 각국이 통화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모든 통화가 절상될 수는 없다. 특정 통화가치가 오르면 다른 통화가치는 반드시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환율전쟁에서 이긴(통화 절상) 국가는 ‘인플레이션 안정’이라는 전리품을 얻게 되고, 패배한(통화 절하) 국가는 ‘인플레이션 앙등’이라는 후유증을 겪어야 한다.
각국이 통화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금리 인상과 시장 개입은 일종의 긴축정책이어서 경기 침체와 같은 희생이 따른다. 이달 중순에 열릴 춘계 국제통화기금(IMF) 총회에서 올해 세계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4% 밑으로 또 한 차례 내릴지 관심이 쏠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올해 1분기 기업실적도 어닝서프라이즈보다 어닝쇼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종전에 수출과 경기 부양을 위한 환율전쟁이 치러질 때 증시가 가장 먼저 혜택을 받은 점을 감안하면 이번처럼 인플레이션 안정을 위한 환율전쟁이 심해지면 증시가 가장 빨리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칼날을 타는 무속인이 떨어지면 상처가 깊게 나듯이 거품이 심한 미국 증시에서 유동성과 경기, 실적 등 어느 한 요인에 불안 요인이 생기면 하이먼-민스크의 ‘어느 날 갑자기(someday sometimes) 이론’대로 주가가 급락하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 한국 등 다른 나라 증시도 마찬가지다. 인플레이션 안정을 위한 환율전쟁은 세계 모든 국가에 손해를 끼치는 ‘비협력적 게임’이다. 각국이 이런 게임을 지속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조만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고 유가를 안정시키면서 자국 경제 여건에 맞게 적정 수준의 통화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기가 임박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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