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공항·63빌딩·롯데타워…'이 공장' 없었으면 건설 불가능했다

입력 2022-04-11 14:34   수정 2022-04-11 14:43


쓸쓸한 퇴장이다. 김포공항 활주로, 여의도 63빌딩, 청계천 복원 그리고 롯데월드타워에 모두 이 공장에서 만든 레미콘이 들어갔다. 하지만 ‘산업화의 공로’를 대접받기는커녕 ‘혐오 시설’ 취급만 받다가 갈 곳도 정하지 못한 채 방부터 먼저 빼는 처지가 됐다. 레미콘 업체 삼표산업의 서울 성수동 공장 얘기다.

“대체 부지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6월 말까지 철거를 진행합니다. 쫓겨나듯 시설을 해체하는 것이 45년간 한국 산업을 지탱했던 시설에 어울리는 고별식은 결코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난달 28일 성수동 삼표 레미콘 공장 해체공사 착공식을 바라보던 윤인곤 삼표산업 대표의 표정은 어두웠다. 삼표 관계자와 대조적으로 인근 주민들은 시설 철거를 반기는 분위기다. 소음과 분진이 줄고 레미콘 믹서트럭이 유발한 교통체증이 해결될 전망이어서다. 시선을 가리던 레미콘 시설이 사라지고 서울을 상징하는 핫플레이스가 들어선다는 계획도 기대를 키운다. 하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질 레미콘 공장은 과연 기억할 필요도 없는 ‘흉물’이나 ‘위험시설’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성수공장은 없어져야할 유해시설이었나
성수동 1가 683번지 삼표 레미콘 공장은 1972년 옛 강원산업그룹(현 삼표산업)이 매립공사로 만들었다. 2만7828㎡ 공장 부지를 포함해 인근 4만평은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 모래 퇴적층이 쌓인 지대였다. 매년 여름 홍수 피해가 발생해 인근 주민에 큰 피해를 주자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매립을 지시했다. 당시 골재 사업을 하던 강원산업그룹이 공사를 맡았다. 강원산업은 골재 채취 사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1977년 부지 위에 레미콘 공장을 가동했다.

성수 공장은 1979년 국내 첫 KS(표준)인증을 받고 자동화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업계를 선도하는 공장이 됐다. 무엇보다 수도권 대규모 택지개발의 핵심 레미콘 공급 기지 역할을 했다. 45년간 서울 주요 공사 현장에 79.3㎡(24평) 아파트 기준 200만호를 건설할 수 있는 4500만㎥ 규모의 레미콘을 공급했다. 1988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실시된 각종 대규모 사회기반시설(SOC) 사업에 삼표 레미콘이 들어갔다. 김포공항 활주로, 정부 과천청사, 여의도 63빌딩 같은 옛 시절 공사부터 강북 뉴타운 조성공사, 청계천 복원공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롯데월드타워에도 납품됐다. 삼표그룹 관계자는 “서울시내 교통요충지에 위치한 성수공장이 없었더라면 건설 공사가 지연되거나 차질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타운 조성, 정부청사 등에 주택공급도 앞장

2019년엔 레미콘 업계로는 이례적으로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업무유공 표창(장관상)을 받았다.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의 지하 주차장 건설에서 타설을 도맡았기 때문이다. 국립중앙극장이 있는 서울 중구는 극심한 교통체증 탓에 대다수 레미콘업체가 공급에 난색을 보였다. 철근과 함께 골조 공사의 핵심인 레미콘은 시간이 지나면 굳어지는 특성 때문에 품질 유지를 위해 출하에서 현장 타설까지 60분 내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성수 공장이 서울 시내에 있다는 지리적 이점은 여러모로 큰 힘이 됐다.

성수 공장은 단일 공장으론 아시아 최대 규모 레미콘 생산 시설이기도 했다. 5대의 레미콘 배합설비(배치플랜트)에서 하루 1200여대의 레미콘 믹서트럭이 레미콘을 받아갈 수 있었다. 최대 레미콘 생산량은 연 175만㎥에 달했다. 79.3㎡(24평) 아파트 7만3000여가구, 잠실 롯데타워월드 8개를 지을 수 있는 물량이다. 서울 전체 레미콘 생산의 절반 이상을 이 한 공장이 떠맡았다.
청년창업공간, K팝공연장 등 다양한 활용방안 모색

적잖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대형 산업시설을 도시 외부로 빼내라는 시대의 압력을 피할 수는 없었다. 1998년 고건 서울시장 재임 시절 시청 신청사 후보지로 검토됐고, 2004년 이명박 시장 재임 땐 서울숲과 연계해 개발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2010년 오세훈 시장 시절엔 현대자동차그룹의 신사옥인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건립이 추진되기도 했다. 결국 서울시와 성동구, 공장 운영사인 삼표산업과 부지 소유주인 현대제철은 2017년 이 부지를 2022년 6월까지 부지를 이전하고 공원화하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이후에도 5년간 100여차례 협상을 거친 결과, 삼표가 현대제철로부터 부지를 매입한 후 독자 개발하는 방향으로 변경됐다. 현재 서울시와 삼표 측은 청년 창업 공간이나 K팝 공연장 등 다양한 방안을 놓고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책없이 떠나는 삼표...서울지역 레미콘 공급난 우려도

떠나는 순간까지 삼표의 마음은 편치 않다. 대체 부지를 마련하지 못해서다. 2017년 협약 땐 새 공장 부지를 마련한 후 이전키로 했지만 ‘공수표’가 됐다. 성동구 등 주요 지역 30여 곳과 부지 확보 협상을 진행중이지만 결과를 낙관하기 힘든 상태다.

성수 공장의 이전은 서울 시민의 삶에도 적지 않은 차질을 빚을 수 있다. 서울 내 레미콘 공급 핵심 기지가 사라지면서 향후 서울지역 재건축에도 빨간불이 들어왔다. 60분 안에 레미콘이 건설 현장에 공급해야 하는데 교통체증이 심한 서울 주요 지역에선 마땅한 대안이 없는 탓이다. 레미콘 공급 차질은 건설 현장의 공기 지연과 자재 조달 비용 증가로 이어질 수도 있다.

삼표그룹 관계자는 “서울 도심 내 레미콘 공급을 책임졌던 성수 공장은 ‘한강의 기적’과 서울 시민의 주거 복지 안정을 위한 아파트 대량 공급을 가능케 했던 상징적 장소”라고 반복해 말했다. 스웨덴 말뫼 조선소가 마지막 크레인을 단돈 1달러에 한국 조선소에 팔아넘길 때 시민들이 모두 눈물지었던 ‘말뫼의 눈물’과 같은 석별의 정을 삼표 성수 공장에 기대했던 것은 과연 지나친 바람이었을까….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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