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던 메르켈이 요즘 엄혹한 재평가를 받고 있다. 단추를 잘못 끼운 그의 에너지 및 외교안보 정책이 독일은 물론 유럽 전역을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건을 계기로 밀어붙인 ‘탈(脫)원전’ 정책이 발단이다. 원전 중단으로 부족해진 에너지를 러시아산(産) 가스로 해결했고, 독일을 ‘에너지 종주국’ 러시아의 볼모로 만들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자행한 데는 유럽 최대 국가인 독일의 이런 약점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메르켈의 탈원전 정책이 얼마나 무모한지는 독일을 빼고 영국 프랑스 등 인근 국가들과 미국은 물론 사고 당사국인 일본까지 원전 비중을 높이고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세계 각국에 떨어진 ‘발등의 불’인 탄소배출량 감축을 위한 현실적 대안으로 원전만 한 게 없기 때문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메르켈이 탈원전에 매달린 데는 사정이 있었다. ‘협치 강박증’ 탓이었다. 연립정부 구성을 위해 환경원리주의 정당인 독일녹색당까지 끌어들이면서, 그 당의 간판 정책인 탈원전을 수용한 것이다. ‘협치’가 아름다운 이미지와 달리 국정을 왜곡하고 나라의 미래를 병들게 하는 독(毒)이 될 수도 있음을 일깨우는 사례다.
국정을 책임진 지도자에게는 ‘중재’ ‘협력’ ‘합의’ 못지않게 시류(時流)와 고독하게 싸우는 결단의 리더십이 더 필요한 경우가 많다. 메르켈의 전임자인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그런 점에서 정반대로 비교된다. 좌파 사회민주당 소속 총리였던 그는 노동조합의 만성파업으로 독일 경제가 활력을 잃고 ‘유럽의 병자’ 소리까지 듣게 되자, 기업인들과 손잡고 노조를 설득해 노동개혁을 단행했다. 그 덕분에 나라가 활기를 되찾으면서 메르켈 시대의 태평성대에 디딤돌을 놓았지만, 노동기득권을 잃은 지지자들이 등을 돌려 총리직에서 내려와야 했다.
국가의 미래를 내다보고 결단을 내리기보다 당장의 인기라는 ‘꿀’만 빨다가 나라를 멍들게 한 지도자가 적지 않다. 브라질 전 대통령인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도 그런 사례다. 강력한 빈민구제 프로그램(보우사 파밀리아) 등 복지정책 확대로 2010년 퇴임 당시 80%의 기록적 지지를 받았지만, 이후 브라질은 성장률 급속 하락 속에서 빈부격차가 더 확대되고 정치 혼란까지 가세하는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산유국인 브라질은 룰라 재임 당시 요행히도 국제 유가가 고공 행진한 덕분에 재정이 풍부해졌고, 룰라는 그 돈을 장기적 관점이 아니라 당장 인기를 끌 곳에 주로 써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배까지 불렸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이번주 주요 기사로 다룬 <구세주로 칭송받고 도둑으로 조롱받는 룰라>에 자세한 내용이 담겨 있다.
퇴임을 20여 일 앞둔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역대 최고인 40%의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요인도 차분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일부 지적대로 ‘핵심 지지자들이 싫어할 어떤 개혁에도 손대지 않았다’는 게 비결이라면 뿌듯해할 일이 아니다. 국민연금을 ‘더 내고 덜 받는’ 방향으로 개혁하는 방안이 마련되자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며 대놓고 퇴짜를 놓은 장면이 그의 ‘고정 지지율 40%’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역할 모델로 자임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무역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 현실을 고민한 끝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했고, 북한의 위협을 견제할 한·미 동맹 강화를 위해 이라크 파병을 결단했다. 반미 좌파 성향의 핵심 지지자들로부터 “우리는 노사모(노무현에게 사기당한 사람들의 모임)”라는 격렬한 반발을 받았지만 밀어붙였다. 정치 지도자에게 높은 지지율만큼 유혹적인 건 많지 않다. 참된 국정을 위해 그걸 이겨내야 하는 게 지도자의 운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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