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천문학적 금액을 쏟아부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라인 구축에 공을 들이는 가운데 핵심 장비 리드타임(주문 후 장비를 공급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어 비상이 걸렸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전 3개월에 불과했던 리드타임은 현재 평균 18개월, 최장 30개월까지도 예상을 해야 하는 상황. 장비 수급이 최대 과제로 떠올랐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지난 7일 "반도체 칩 제조에 사용하는 핵심 장비의 리드타임이 최대 12~18개월에서 최대 30개월로 늘었다"며 "전례 없는 부품 부족 현상이 장비 산업을 넘어 반도체 업계 전체를 강타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삼성전자와 TSMC 등이 장비 공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위 경영진을 해외로 파견하고 있다. 이런 노력에도 주요 반도체 업체들은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장비 수급 불균형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면서 글로벌 반도체 제조 기업들의 투자계획 변경도 불가피할 것이라는 관측. 장비 업체들이 원활한 장비 생산에 나서려면 부품 병목현상이 해결돼야 하는데 대안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부품 업체들도 과감한 투자가 이어져야 하지만 공급 확대에 소극적인 상태다. 한진만 삼성전자 부사장과 노종원 SK하이닉스 사장은 최근 실적발표에서 올해도 장비 리드타임이 길어지고 있다고 인정하면서 투자계획 수립과 집행에 이 점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반도체 제조공장(팹) 초기 투자는 부지와 건물(쉘)을 제외하면 대부분 반도체 장비 도입 비용이 차지한다. 생산라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반도체 장비 비중이 80~90%에 달한다. 실제로 인텔의 천문학적 반도체 제조·연구개발(R&D) 투자 비용 중 상당 부분이 반도체 장비 도입에 쓰일 전망이다.
인텔은 지난해 미국 애리조나 팹 확장에 200억달러(한화 약 24조7500억원), 지난달 미국 오하이오주 팹 구축에 200억달러, 이번 유럽에 330억유로(약 44조4000억원) 규모를 초기 인프라 구축에 쏟는다고 밝혔다.
인텔의 공격적 반도체 제조 인프라 투자는 글로벌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공급망에 미치는 여파가 상당하다. 소부장 기업에는 삼성전자와 TSMC에 견줄 대형 고객사가 나타나 신규 시장 창출 기회가 됐지만 리드타임 지연으로 인한 반도체 공급난이 한층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반도체 장비 시장은 ASML,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TEL, 램리서치, KLA 5개사가 전체 60% 이상을 차지한다. 인텔 투자의 가장 수혜 기업으로 주목받는 것도 이들이다. 그중에서도 업계의 최대 관심사는 ASML의 생산량 확대 여부다.
ASML은 반도체 미세공정에 필수로 쓰이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만드는 기업으로, 시장 점유율이 90%에 육박한다. 2위 그룹인 일본 기업 니콘·캐논과의 격차가 크다. ASML의 EUV 노광장비는 대당 2000억원을 호가하는 초고가 장비임에도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EUV 장비를 사기 위해 줄을 섰다. ASML은 지난해 이 장비를 42대를 만들어 63억유로(약 8조3954억원)의 매출을 올렸는데 대만이 44%, 한국이 35%를 차지했다. 중국은 미국 제재로 16%에 그쳤다.
TSMC를 따라잡아야 하는 삼성전자로서는 초미세 공정에서의 경쟁 우위를 가져오려면 EUV 장비 확보가 필수. 때문에 삼성전자와 TSMC의 'ASML 구애전'이 한층 격화될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2018년 하반기 세계 최초로 EUV 노광기술을 적용한 7나노 반도체 생산을 시작한 바 있다. 최근에는 EUV 공정을 적용해 14나노 D램 양산에도 돌입했다.
TSMC와의 경쟁 우위를 위한 3나노 공정에서도 EUV 장비는 핵심이다. TSMC는 내년 하반기 3나노, 2025년 2나노 공정 도입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삼성전자는 3나노 공정을 TSMC보다 빠른 올해 상반기, 2나노는 2025년 도입하겠다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하지만 피터 베닝크 ASML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파이낸셜타임즈(FT)와 인터뷰에서 "올해와 내년에 생산을 확대하고 출하를 늘릴 계획이지만 여전히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ASML의 본사가 있는 네덜란드 에인트호번과 삼성 반도체 주력 생산거점인 경기도 화성시가 도시 간 협력관계를 구축할 전망이다. 업계에선 삼성전자가 천군만마를 얻었다고 본다. 베닝크 CEO는 "화성시 지원 덕분에 반도체 클러스터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며 "이번 캠퍼스 구축과 더불어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ASML의 화성 반도체 클러스터는 좋은 사례다. 초미세 공정을 다루는 반도체 산업은 장비의 적은 이동에도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업체간 물리적 거리도 중요하다"며 "경기도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DB하이텍 등 국내 반도체 회사들이 모여 있는 만큼 ASML의 사례를 더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생태계 최상단에 위치한 삼성전자나 TSMC, 인텔, SK하이닉스는 장비 도입이 시급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반도체 장비 시장이 넓어졌다는 뜻"이라며 "일부 해외 소수 업체들에 장비를 의존하는 현상을 해소할 계기로 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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