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홀, 폐허, 한계…. 섬뜩하고 막막한 단어의 등장은 ‘결국 올 것이 오고 있구나’라는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공포의 근저에는 감당 불가 지경의 나랏빚이 자리한다. 2017년 660조원이던 국가부채는 올해 최소 1076조원으로 치솟는다. 2018년 35.9%였던 국가채무 비율도 올 연말 50%대 진입을 예약했다. 1993년 43%에서 불과 7년 만에 100%를 넘어선 일본, 30%대에서 12년 만에 100%대로 직행한 그리스 못지않은 가속도다.
‘자본주의 모범국’ 한국 경제가 싱크홀 아래로 추락하는 그림은 상상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불가능의 영역은 아니다. 지금까지 제시된 가능성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구조화된 내재적 모순이 누적돼 노동자 폭동이 터지는 경우다. 마르크스가 떠들어 익숙한 이 시나리오는 엉터리로 판명났다.
안심은 이르다. ‘진짜 천재 경제학자’ 슘페터가 제시한 더 강력한 시나리오가 남아 있다. 꽤나 놀랍게도 슘페터 역시 자본주의 종말을 예견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종말에 이르는 반전 과정이다. 그는 ‘자유’를 옹호하는 덕성 덕분에 자본주의는 눈부신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성공 동력인 바로 그 넘치는 자유에 기생하는 반(反)자유적 선동가들의 득세를 막지 못해 결국 사회주의로 이행하고 말 운명이라고 결론지었다.
‘슘페터 몰락’은 사변적 상상력의 허황한 산물이 아니다. 한때 프랑스와 이탈리아보다 잘살았던 아르헨티나가 이론의 작동 가능성을 입증했다. 아르헨티나 경제는 페론 정권이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를 밀어붙인 1940년대부터 추락하기 시작했다. ‘국민의 정부’를 자임하며 재정을 털고, 내수산업 육성 명목으로 수출기업에서 자금을 염출해 노동자와 저소득층에 ‘무차별 퍼주기’하면서부터다. 돈줄이 마르자 중앙은행 발권력까지 동원했다. 그 결말은 살인적 인플레이션과 경제 파탄이었다.
한국을 덮친 ‘싱크홀 경제’도 대중영합주의 확산의 후폭풍이다. 노무현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2003년 결산백서에서 “더 많은 포퓰리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게 시작이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선 5년 내내 소주성이라는 이름의 ‘대중경제학’ 처방이 노골화됐다.
하지만 성적표는 초라하다. 평균 경제성장률만 해도 연 2.1%로 박근혜 정부(3.0%)보다 크게 부진하다. 2019년 성장률이 2.2%로 쪼그라든 데서 보듯 코로나 탓만도 아니다. 1인당 총소득(GNI) 증가율도 연 1.1%로 박 정부(4.0%)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그런데도 작은 성과를 부풀리고 남의 노력에 무임승차하며 끝없이 ‘선진국 진입’을 자화자찬 중이다. ‘이제 민주주의가 꽃피었으므로 번영의 황금시대가 시작됐다’던 한 세기 전 페로니즘의 선동과 판박이다.
대중주의 경도는 선진 자본주의 경제의 최대 위협이다. 대중경제학적 처방은 언제나 열광으로 시작해 급격한 인플레와 실업으로 끝난다. 그리고 피해는 빈민과 중산층을 직격한다.
눈 밝은 한국 유권자들은 지난 대선에서 대중주의를 심판했다. 본격 승부는 이제부터다. 부동산·일자리 대란에도 자칭 ‘포퓰리스트’ 후보는 절반 가까운 표를 쓸어 담았다. 거대여당의 검수완박 폭주에서 전해지는 기운 역시 음울하다. 노골적인 ‘포퓰리스트 보위’ 입법을 밀어붙이는 대목에서 대중주의 세력의 무력과 결의가 감지된다.
슘페터는 자신의 존재가치 입증이 지상목표인 지식인 집단의 방종을 선진 자본주의의 최대 적으로 꼽았다. 이들이 맘먹고 선동하면 낙오한 대중은 포섭될 수밖에 없다고 좌절했다. 한국의 ‘슘페터 몰락’ 저지를 위한 패러다임 재구축이 윤석열 정부의 핵심 아젠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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