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진품인지 위작인지를 판단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술 중 하나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이다. 일종의 나이테 역할을 하는 탄소(C-14)를 통해 물감과 캔버스 등이 만들어진 연대를 측정하고, 이를 작품의 정보와 비교하는 것이다. 진위 논란에 휩싸였던 박수근(1914∼65)의 '빨래터'도 같은 방법으로 오명을 벗을 수 있었다. 캔버스와 액자, 안료 등이 비슷한 시기 만들어진 다른 작품과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유명 화가의 걸작이 아니라면 진품 감정에 이 같은 최첨단 기술을 이용하기 쉽지 않다.
국내 대표 화랑들의 모임인 한국화랑협회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미술품 감정 관련 과학 분석을 함께 진행하고 자문을 받기로 업무협약(MOU)을 맺으면서다. 화랑협회는 "지난 12일 서울 성북구 KIST 본원에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며 "재료와 안료 등 연대분석에 대한 도움을 받고 함께 과학 감정을 위한 데이터를 축적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화랑협회와 KIST는 또 대체불가능토큰(NFT)과 블록체인, 인공지능(AI) 등 미술 분야 신기술에 대한 자문을 받기로 했다. 관련 세미나나 강연도 열기로 했다. 미술계 관계자는 "화가들은 상대적으로 기술에 약하다는 인식이 많았는데, 이번 협약을 통해 작가들의 작품 스펙트럼과 수준이 전반적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했다. 협약 내용에는 키네틱 아트(움직이는 예술품) 작가에 대한 기술적 자문과 합동 작업 등도 포함된다.
165개 회원 갤러리를 거느린 화랑협회는 국내 최대 규모 아트페어인 KIAF를 주최하는 단체다. 특히 이번 협약의 중심인 미술품감정위원회는 1982년부터 국내 미술품을 감정해 온 국내 최고 수준의 전문 감정기구로, 가장 많은 미술품 감정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 KIST 역시 한국을 대표하는 과학기술 연구소로 꼽힌다. 화랑협회 관계자는 "화랑협회의 방대한 미술품 데이터와 첨단 과학기술이 만나 더욱 정교한 분석과 감정이 가능해질 것"이라며 "NFT 등 다른 신기술에 관해서도 앞으로 다양한 협력안을 구상할 예정"이라고 했다.
황달성 화랑협회장은 "작년부터 미술시장이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역대급 호황을 누리고 있는데, 코로나19로 인한 급격한 디지털화의 진행이 큰 요인 중 하나"라며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 과학 기술과 제도의 뒷받침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고 했다. 이어 그는 "미술계의 디지털 신사업 구축은 한국 미술시장의 글로벌화와 도약을 위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며 "미술 시장의 투명성이 더욱 높아지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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