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산 기슭에 밀레니엄힐튼이라는 멋진 고층 건물이 있다. 서울역 주변에 속속 들어선 고층 건물로 가려지긴 했지만 한때 이 일대 랜드마크 구실도 했다. 세계적 힐튼 체인의 5성급 고급 호텔이다. 멋진 행사장과 다양한 고급 식당이 있어 내부도 멋지다. 39년 된 이 현대식 건물은 미국에서 활동해온 저명한 건축가인 김종성 씨가 설계한 것이어서 더 유명해졌다. 이 건물이 철거 상황에 놓이면서 보존을 주장·호소하는 목소리가 높다. 물론 재산권을 행사하는 소유주는 분명히 있다. 처음 대우그룹 소유에서 지금은 특정 자산운용사 것이 됐다. ‘보존 호소 그룹’도 문화적·건축사적 가치에 주목할 뿐, 당장 소유권을 침해하려는 것은 아니다. 효율성을 높이도록 재개발하느냐, 최대한 존치하느냐로 건설업계 논쟁이 뜨겁다. 철거 외 대안은 없을까.
여러 손을 거쳐 지금은 국내 부동산펀드 운용회사인 이지스자산운용 소유다. 1999년 싱가포르 부동산 투자회사가 사들였다가 2004년 밀레니엄힐튼호텔로 재출발했지만 경영난도 겪었다. 이 건물을 사들인 자산운용사는 무려 1조원을 투자했다. 투자자 수익 기대에 맞춰야 한다. 재개발도 못하는 건물에 1조원을 투자해 발이 묶이면 투자자 손해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당초 계획한 대로 재건축·재개발을 할 수 없게 되면 부동산펀드 등 자산운용업계는 침체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재개발을 통한 진화’라는 도시의 발달 모델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재건축이라고 무조건 경계할 필요는 없다. 더 높이, 더 멋지게, 현대감각이 한층 우러나는 건물을 세우면 된다. 소유주도 그럴 계획에서 1조원이라는 거액을 투자한 것이다. 투자에 따른 개발 이익을 누리고, 현대식 설계와 빼어난 첨단 공법으로 더 멋진 21세기형 랜드마크 빌딩을 서울 강북 도심 인근에 올리면 새로운 관광명소를 창출하는 일이 된다. ‘보존 논리’에 따라 남겨온 청계천의 오래된 세운상가와 그 주변이 지금 어떤 모습인가. ‘한국 근대사의 발전 현장’이라지만 너무 누추하고 지저분해 사람들의 통행이 끊겨버린 도심의 공동화 지역으로 전락한 것 아닌가. 가장 중요한 것은 소유권자의 개발 의지다. 사적 소유에 대해 주변에서 이러쿵저러쿵 설익은 자기 이상을 내세우며 재활용 계획에 과도하게 참견해선 안 된다.
많은 국민의 기억과 추억에 남아 있는 이 건물은 구조적으로나 용도로도 빼어난 수작이다. 화려한 중앙 홀과 여러 부대시설의 공간은 완성도 차원에서 다시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게 많은 건축 전문가의 지적이다. 실제로 설계자가 지을 때도 수익을 더 내려 하기보다 멋과 철학을 담은 것으로 유명하다. 미래로 나아가도 이런 건물은 문화유산이라는 인식에서 보전할 가치가 있다. 그나마도 근래에 중수한 몇몇 고궁을 빼면 서울에 문화적 가치와 역사성을 가진 구조물이 얼마나 있나. 잘 지키고 가꾸며 미래 세대에 유산으로 남길 만한 건물이다.
물론 주인이 분명히 있는 사적 소유물이라는 점을 부인할 순 없다. 손해를 보면서까지 적자가 계속되는 고급 호텔로 무조건 유지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그렇다 해도 ‘전면 철거, 전면 재시공’으로 가기에는 너무 아까운 건물이다. 단순히 건축물 하나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이, 서울의 소중한 문화 공간 하나가 사라진다는 차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일반인은 건축 전문가와 달리 밀레니엄힐튼호텔의 진짜 가치를 모를 수 있다. 더 높고 더 편리한 새 건물이라고 반드시 좋다는 보장도 없다.
건물 내부의 리노베이션 같은 것도 적극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 조금 더 보존하면서 사고의 유연성을 발휘해 호텔 외 수익을 더 낼 수 있는 상업적 건물로 용도 변경을 생각해보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반면 효율·편리를 따지는 관점에서 새롭게 개발하자는 목소리도 커진다. 세계적으로 오랜 도시들이 대개 구도심(old city)을 보호하면서 신도심 개발을 병행하는 식으로 발전해왔다. 서울도 그렇다. 한국건축가협회 등이 토론회까지 연 것을 보면 힐튼호텔의 가치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1조원을 투자한 자산운용사가 더 멋진 공간을 창출하겠다는 의지도 중요하다. 서울시가 용도변경 같은 부분서 우대해주면서 건물의 자발적 존치를 유도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어떤 경우든 사적 소유권의 존중이라는 큰 틀이 훼손돼서는 안 된다. 그래야 어떻게든 도시가 진화할 수 있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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