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를 ‘짖지 않는 개(The Dog That Didn’t Bark)’로 경시해 왔던 국제통화기금(IMF)은 종전 입장을 확 바꿔 각 회원국에 인플레 안정에 최우선순위를 둘 것을 촉구했다. 각국 중앙은행도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캐나다, 뉴질랜드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빅스텝(0.5%포인트)으로 올린 데 이어 다음달 초 열릴 미국 중앙은행(Fed) 회의에서도 같은 폭으로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과연 인플레는 잡힐 것인가?
2년 전 하이먼 민스키의 리스크 이론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아무도 모르는(nobody knows)’ 코로나 사태를 맞아 세계 경제는 ‘원시형 경제’라는 용어가 나올 정도로 앞길이 보이지 않았다. 원년에는 ‘I자형’ ‘L자형’ ‘W자형’ ‘U자형’ ‘나이키형’ ‘V자형’, 심지어는 ‘로켓 반등형’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예측 시각이 나오면서 성장률이 -3.5%까지 추락했다.
작년 1분기까지만 하더라도 디플레이션이 우려될 정도로 암울했던 세계 경제가 같은 해 4월 미국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예상보다 높게 나오자 갑작스럽게 인플레 논쟁이 불거졌다. Fed조차 일시적 현상에 그칠 것으로 봤던 인플레가 지난 1년 동안 날로 높아져 이제는 세계 경제의 최대 난제로 부상했다.
코로나발 인플레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론적 배경이 필요하다. 인플레는 원인별로 비용 상승과 수요 견인으로 나눠지고, 상승 속도에 따라 마일드·캘로핑·하이퍼로, 경기와 관련해 디플레이션·스태그플레이션·슬로플레이션·골디락스, 정책 의지와 결부돼 리플레이션·디스인플레, 그리고 공유 경제와 관련해 데모크라플레이션 등이 있다.
종전과 달리 이번에 인플레가 심각한 것은 동일한 통화정책 시차(9∼1년) 내에 모든 가능성이 한꺼번에 거론되는 ‘다중 복합 공선형’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요인은 코로나 사태가 가진 독특한 특성 때문이다. 뉴 노멀 디스토피아의 첫 사례인 코로나 사태는 초기 충격이 커 Fed가 임시회의를 거쳐 제로 금리와 무제한 양적 완화(QE)로 대처했다.
어빙 피셔의 화폐수량설(MV=PT, M은 통화량, V는 통화유통속도, P는 물가수준, T는 산출량)에 따르면 통화공급은 그대로 물가로 연결된다. 전염성이 강한 코로나 사태는 백신만 보급되면 세계 경제가 ‘절연’에서 ‘연계’ 체제로 이행되고 돈이 돌기 시작하면 작년 4월 이후처럼 ‘쇼크’라는 용어가 나올 만큼 인플레 문제가 불거진다.
인플레 성격을 놓고 ‘일시적’이냐 ‘장기적’이냐 논쟁이 거세질 무렵 작년 2분기 미국 경제성장률이 높게 나오자 정책 요인에 의해 촉발된 인플레가 수요 견인 인플레로 옮겨지면서 하이퍼 인플레 우려까지 제기됐다. 오쿤의 법칙(GDP 갭=실제성장률-잠재성장률, Fed가 추정한 잠재성장률 1.75%)상 작년 성장률 5.7%는 무려 4%에 가까운 인플레 갭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이퍼 인플레 우려도 잠시 작년 여름 휴가철이 끝나자마자 노동시장을 중심으로 심화된 병목 현상과 공급망 부족 등으로 비용 요건이 악화되자 곧바로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급부상했다. 하이퍼 인플레와 스태그플레이션을 사이에 두고 그 정도에 따라 슬로플레이션과 디스인플레 우려도 난무하고 있다.
공급망 부족과 비용 여건 악화가 세계 경제 성장과 물가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는 간단하게 총공급 곡선(AgS·노동시장과 생산함수에 의해 도출)과 총수요 곡선(AgD·투자와 저축을 의미하는 ‘IS 곡선’, 유동성 선호와 화폐 공급을 의미하는 ‘LM 곡선’에 의해 도출) 이론을 통해 보면 쉽게 이해된다<그림 ‘공급망과 세계경제’ 참조>.
코로나 사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라 비용 여건이 악화돼 총공급 곡선이 좌측(AgS0→AgS2)으로 이동하면 성장률이 떨어지는 대신 인플레이션율이 올라가는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이 발생한다. 반대로 비용 여건이 개선돼 총공급 곡선이 우측(AgS0→AgS1)으로 이동하면 성장률이 높아지고 인플레이션율이 낮아지는 ‘골디락스’ 국면이 도래한다.
역행적 선택이론은 최근처럼 통화정책 결정에 필요한 완전한 정보를 보유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현상을 분석하는 정보 경제학의 한 부류로 조지 에걸로프 교수가 주장했다. 초기에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2014년 Fed 의장으로 임명된 재닛 옐런(현재 조 바이든 미 정부의 재무장관)의 남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노벨경제학상까지 받은 이론이다.
Fed는 가장 중시하는 인플레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울 때는 통화정책 추진 여건을 한 번 더 확인하는 ‘체크 스윙’ 차원에서 역행적 선택을 활용한다. 인플레 성격을 잘못 판단해 너무 빨리 출구전략을 추진하다간 ‘에클스 실수’를, 너무 늦게 추진하다간 ‘그린스펀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두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공존하는 여건에서 각국 중앙은행의 선봉장인 Fed가 어떤 행로를 걸을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통화정책 목표와 우선순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Fed는 2012년부터 ‘인플레 안정’과 ‘고용 창출’을 양대 책무로 설정했다. 양대 목표가 충돌될 때는 작년 11월 회의 이전까지 후자에 우선순위를 둬 통화정책을 운용해 왔다.
우선순위를 더 두고 있는 고용 목표가 달성되지 않는 여건에서는 이번처럼 인플레가 우려된다고 하더라도 기조를 변경하는 일은 쉽지 않다(통화정책 불가역성). 작년 8월 잭슨홀 미팅에서 Fed가 2013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트리블 버블(금융완화 버블+인플레 버블+테이퍼링 지연 버블)’을 키우고 있다는 우려 속에서도 금융 완화를 고집한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다.
이번에 인플레는 Fed가 키웠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제성(preemptive)’이 생명인 통화정책에서 작년 4월 이후 ‘쇼크’로 불릴 만큼 불거진 인플레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했다면 올해 3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인플레 타기팅 선인 2%를 무려 네 배 이상 웃도는 8.5% 수준까지 급등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한다. 뒤늦게 인플레의 심각성을 인식한 Fed는 출구전략을 서두르고 있다. 첫 단추인 테이퍼링은 금융위기 이후 출구전략을 추진한 벤 버냉키 당시 Fed 의장이 처음 언급한 이후 마무리되기까지 1년10개월이 걸렸으나 이번에는 처음 언급된 작년 9월 회의 이후 불과 7개월(실행은 4개월) 만인 올해 3월 마무리했다.
테이퍼링 종료 이후 첫 금리 인상과 연계시키는 다음 수순도 금융위기 때는 1년2개월 넘게 걸렸으나 이번에는 곧바로 단행했다. 마지막 단계인 양적 긴축(QT)은 금융위기 때는 첫 금리 인상 이후 2년이 되는 2017년에 추진됐으나 이번에는 2∼3개월 만인 5월이나 6월 회의에서 추진될 가능성이 높다.
금융위기 때와 달리 Fed가 출구전략을 서두르는 것은 이번 인플레가 ‘경기순환’보다 ‘공급망 붕괴에 따른 비용 상승 요인’이 크다는 판단에서다. 글로벌 공급망 분야 석학인 요시 셰피 매사추세츠 공대(MIT) 교수에 따르면 특정 사건(코로나 지원금 등)을 계기로 소비가 증가할 경우 소매, 유통, 제조, 원자재 순으로 공급망이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에서 수급 간 불균형이 심화되는 이른바 ‘채찍 효과(bullwhip effect)’가 나타나 인플레이션이 중폭된다고 주장했다.
채찍 효과가 총수요와 총공급 요인 간 악순환 고리의 주범이라면 인플레를 안정시키기 위한 방안은 역(逆)채찍 효과가 나타날 수 있도록 출구전략을 빠르고 강하게 가져가는 것이 최선의 방안이다. 합리적 기대가설에 따르면 코로나 사태 이후처럼 디지털 콘택트 추세의 급진전으로 네트워킹 효과가 크게 나타날 때는 급진적인 출구전략 등을 통해 시장에 확실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인플레 기대심리를 차단하는 데 효과적이다.
팬 차트(pan chart)로 각국의 인플레 정도와 출구전략 추진 가능성을 판단해 보면 대부분 선진국은 중심축(pivot state)에 몰려 있다. Fed를 시작으로 다른 선진국 중앙은행들도 출구전략을 곧바로 추진할 확률이 높다는 의미다. 일부 신흥국이 금리를 인상하는 것은 선진국 출구전략에 따른 예방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인플레와는 크게 연관이 없다.
문제는 주로 총수요 대책인 출구전략을 서두르더라도 과연 인플레를 잡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급진적 출구전략은 성장이론에서 실제성장률과 균형성장률, 잠재성장률이 같은 황금률(golden rule)이 유지돼야 지속 성장이 가능하다고 본 ‘해로드-도마의 칼날 이론’에 비유된다. 칼날 위를 타는 무속인이 떨어지면 상처가 깊게 난다.
‘유동성 프리미엄 가설’ ‘기대 가설’ ‘분할시장 가설’에 따르면 수익률 곡선이 양(+)의 기울기(단저장고)를 나타내면 투자에 유리한 환경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어 경기가 회복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반대로 수익률이 역전(단고장저)돼 음(-)의 기울기를 나타내면 차입비용 증가로 경기가 침체 국면에 접어들 확률이 높다는 의미다.
1960년 이후 15차례에 걸쳐 장단기 금리 차가 마이너스, 즉 단고장저 현상이 발생했고 대부분 경기 침체가 수반됐다. 워런 버핏과 같은 투자의 구루가 뉴욕 연방은행이 매월 확률 모델을 이용해 발표하는 장단기 금리차의 경기 예측력을 각종 투자 판단 때 가장 많이 활용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확률 모델이란 장단기 금리차의 누적확률분포를 이용해 12개월 이내에 경기 침체가 발생할 가능성을 확률로 변환하는 모델이다. 동모델로 추정한 결과 마이너스 장단기 금리차가 경기 침체를 예측한 확률은 1981∼1982년 침체기 때 98%까지 상승한 적이 있다. 하지만 금융위기 이후에는 그 확률이 떨어지는 현상이 자주 목격됐다.
결국 인플레를 잡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성장 훼손은 재정정책이 보완해줘야 한다. 현재 행동주의 경제학자를 중심으로 ‘빚내서 더 쓰자’는 현대통화이론(MMT·modern monetary theory)을 주장하고 있으나 조 바이든 정부의 실질적인 경제 컨트롤타워인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현대공급중시경제학(MSSE·modern supply-side economics)으로 맞서고 있다. MSSE의 논리는 이렇다. 최근처럼 금융 완화에 따른 숙취와 공유 경제라는 새로운 정책 목표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스태그플레이션을 잡으려면 1980년대 초반의 레이거노믹스처럼 단순히 세율만 낮춰서는 안 되고 1930년대 뉴딜 정책처럼 사회간접자본(SOC) 등 국가 인프라를 개조하는 공급 확대 정책을 추진해야 가능하다는 것이 옐런의 주장이다.
‘미국 재건법’으로 통칭되는 MSSE는 알버트 허쉬만 교수가 주장하는 전후방 연관효과가 커 단기적으로는 인플레를 잡으면서 중장기적으로 성장 잠재력을 확충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고용 면에서도 디지털 시대에 자신의 능력 및 의지와 상관없이 고용시장에서 외면당하는 중하위 계층의 일자리를 늘려 공유 경제 목표에 부합할 수 있다.
MMSE는 미국 경제보다 더 어려운 국내 경제의 대처 방안으로 검토해 봐야 한다. 슈퍼급 예산이나 수시로 편성되는 추가경정예산으로 단순히 재정 지출만 늘려서는 안 된다. MMSE와 같은 획기적인 정책 발상을 토대로 국정을 ‘경제’ 중심으로 운영해야 새 정부 출범 초부터 과제로 떠오른 스크루플레이션, 국가부채 위기, 선진국 함정에 빠질지 모른다는 ‘한국 경제 신위기론’을 극복하고 5년 뒤에 평가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한상춘은…
한국은행,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대우경제연구소(DWERI), 미국 와튼계량경제연구소(WEFA), 중국 옌볜시 해외문제연구소를 거친 국제금융 전문가다. 세계적 신문인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아시아의 유망한 이코노미스트 5인 중 한국 대표로 뽑혔고, 한국경제신문 전문위원으로 《한상춘의 국제경제읽기》를 23년째 매주 연재해 오고 있다. 저서로는 《UR과 한국 경제》 《또 다른 10년이 온다》 《2만 번의 통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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