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서울 성수동 소극장 우란2경에서 개막한 연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사진)은 치매 환자 톰(김지철 분)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영국 극단 ‘시어터 리’가 2017년 런던에서 초연해 호평받은 작품으로 2019년 내한 공연 당시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이번엔 영국 창작진과 한국 배우·제작진이 협업한 첫 라이선스 공연으로 공연기획사 연극열전이 제작했다.
줄거리는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 55세 생일을 맞은 톰은 가족의 방문을 기다리면서 생각에 잠긴다. 극은 기승전결의 서사보다 톰의 머릿속 기억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연출가 기욤 피지는 “제작 과정에서 신경과학자에게 자문을 구하고 치매 환자와 노인들을 인터뷰했다”고 설명했다.
극은 신체극 형식을 통해 기억이란 소재를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약 70분간 대사는 거의 없이 음악에 맞춘 배우들의 동작으로 기억의 심상을 구현한다. 기억은 텍스트가 아니라 시각과 청각, 촉각 등의 이미지로 더 오래, 더 강하게 남기 때문이다. 톰이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기억을 떠올리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아침 공기와 베어 문 사과 한입, 더 빨리 가자고 재촉하던 등 뒤의 친구 등이 음악과 함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행복한 학창 시절을 생각할 때 톰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기억의 한 조각이다.
130여 석 규모의 소극장은 곧 톰의 머릿속이 된다. 관객은 마치 그의 머릿속에 들어앉은 것처럼 기억의 조각들을 공유한다. 톰은 자전거 등교길을 비롯해 첫사랑과의 추억, 결혼식, 아이가 태어난 순간, 교통사고 등 인생의 중요한 조각들을 반복적으로 떠올린다. 기억 속 대부분의 대사는 실제 기억이 그렇듯 당시의 말투와 분위기만 나타낼 뿐 무슨 뜻인지 명료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회상이 반복될수록 기억끼리 얽혀 엉망이 된다. 교실 안에서 술잔을 들고 있다. 아내와 교통사고를 당하기 직전 옷차림이 교복이다. 이 와중에 “남색 재킷 속 주머니에 빨간색 넥타이가 들어 있다”는 성인이 된 딸의 목소리가 귓가를 계속 맴돈다. 기억의 조합이 흐트러지면서 망각으로 산화한다. 기억의 퍼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혼란스러움과 괴로움을 느끼는 치매 환자의 사고 과정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몸짓이 강조되는 극인 만큼 배우 네 명(김지철·김주연·마현진·강은나)의 동선이 철저하게 계획돼 있다. 예컨대 쪽지를 책상에서 떨어뜨리고 줍는 사소한 동작에서도 손짓과 종이를 떨어뜨리는 위치 등이 한 치의 오차 없이 계산돼 있다는 점이 느껴진다. 배우들의 호흡과 동작의 각도 하나, 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숨까지 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공연은 오는 30일까지.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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