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4년에 설립된 영란은행(BOE)은 스웨덴 국립은행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중앙은행입니다. 프랑스 루이 14세(1643~1715년) 치세의 후반기는 전쟁의 연속이었습니다. 특히 1688년부터 1697년까지 지속되었던 아우크스부르크 동맹과의 9년 전쟁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이에 대항했던 국가들의 막대한 재정 지출까지 초래했습니다.
당시 알사스 북부의 팔츠 공작가에 남자 계승자가 없는 것을 틈타 루이 14세는 팔츠의 영토를 요구했습니다.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의 부인이 팔츠가 출신임을 근거로 말이죠. 이에 신성로마제국, 네덜란드, 에스파냐, 스웨덴이 1686년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항하면서 전쟁은 시작됐습니다. 잉글랜드는 명예혁명 이후 전쟁에 참여했죠.
9년 전쟁 참전국들은 겉보기에 유럽 대 프랑스 구도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반프랑스의 중심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과 에스파냐는 발칸반도에서 오스만투르크와 전쟁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1690년 비치헤드 해전에서 56척으로 이루어진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주력 해군이 75척의 프랑스 해군에게 패배하자 잉글랜드는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들이 패전한 곳이 바로 잉글랜드 남단의 도버해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프랑스는 일시적으로나마 도버해협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 남부는 프랑스 육군이 당장이라도 상륙할 것 같은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잉글랜드 정부는 해전에서 상실한 함선을 다시 건조하고 해군을 재건하기 위해 120만파운드의 군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국채를 발행합니다. 문제는 너무 오랫동안 전쟁을 치른 탓에 왕실에 잉글랜드인들이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잉글랜드 왕실은 14% 이자를 제안하며 국채 발행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합니다.
1691년 잉글랜드가 자금 부족에 시달릴 것을 예상한 스코틀랜드인 윌리엄 패터슨은 잉글랜드 정부에게 무리한 제안을 합니다. 왕실이 필요로 하는 자금을 조달해주는 대신 잉글랜드 은행 지주회사를 설립해 정부의 대출을 관리·독점하는 권리를 줄 것을 요구합니다. 여기에 자신들이 발행한 국채를 담보로 지폐를 발행할 권리를 달라고도 요구합니다.
과한 제안이었으나 잉글랜드 정부는 이를 받아들입니다. 1964년 주력 해군이 붕괴하면서 자금을 조달하지 않으면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패터슨의 팀은 12일 만에 120만파운드를 조달해 영란은행을 설립하고, 그 출자금을 연간 8% 이율로 왕실에 대출해줍니다. 왕실은 이 중 80만파운드를 해군 건설에 사용해 급한 불을 끌 수 있었습니다. 결국 잉글랜드 정부가 사면초가에 놓인 것이 중앙은행을 만들게 된 이유가 되었던 셈입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홍기훈 CFA한국협회 금융지성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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