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저작권법이 널리 알려졌지만 필자가 공부했던 1990년대를 넘어 선생이 시작하셨던 1970년대만 해도 법학계에 전공자 한 명을 찾기도 힘들 때였다. 그러니 학계에서 산민을 저작권법학의 비조(鼻祖)로 인정하는 데 큰 이견(異見)이 없다. 그런데 선생이 저작권법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매우 뜻밖의 일로 알려지지 않은 사연이 있다.
산민 선생이 반공법 위반으로 수감 중일 때, 읽고 싶은 책이 있어도 철저한 검열로 반입이 자유롭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저작권법 관련 도서는 교도소에서 불온서적으로 의심하거나 문제 삼지 않아 여러 권을 읽었는데, 국내 전공자가 없던 탓에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고 회고록 등에 남기고 있다. 이 정도로는 산민이 저작권법에 입문하게 된 이유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필자는 우연히 산민과 이어령 선생이 만나는 자리에 배석하여 그 비밀을 알게 됐다. 살아온 궤적으로 볼 때 특별히 접점이 없을 것 같은 두 분은 동갑내기로 수십 년 우정을 쌓아온 절친 사이였다. 대화 중에 산민 선생은 저작권법을 공부해두면 후에 큰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이어령 선생의 조언이 있었다는 추억을 살려냈다. 우연히도 지난 두 달 사이에 생을 마감한 두 선철(先哲)의 우정과 선견지명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유머리스트로 객담집을 두어 권 내기도 했던 산민은 청첩이나 부고를 받지 않으니 감옥이야말로 면학에 최적의 장소라며, 세 끼 식사와 숙소까지 제공받아 저작권법을 공부한 자신이야말로 국비장학생 아니겠냐고 특유의 유머를 날리곤 했다.
일전에 한국번역학회라는 곳에서 ‘번역과 법, 사회’란 주제로 발제를 요청해왔다. 번역학자들 사이에서 망신은 당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번역학, 번역저작권 등 자료를 뒤적였는데, 놀랍게도 1987년과 1996년에 발표된 산민의 글과 논문을 발견하게 됐다. 이처럼 필자의 전공 분야에서 글로 선생을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초기 저작권 판결문 중 ‘소송대리인 변호사 한승헌’이란 문구를 발견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당시는 저작권법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을 때니 산민은 거의 모든 저작권 재판의 원고나 피고 중 어느 한쪽의 대리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요즘은 흔한 말이 된 ‘정보화시대’라는 용어를 제호로 사용한 책, <정보화시대의 저작권> (나남 1996)을 사반세기 전에 펴내셨으니, 선생의 예지력은 놀랍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하겠다.
저작권법을 넘어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 곳에는 거의 예외 없이 산민이 있었다. 고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 형사재판의 변호인으로 선생의 이름이 올라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청(文靑)이기도 했던 산민 주변에는 늘 권력과 싸웠던 문학가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법만 아는 변호사가 즐비한 가운데 선생은 문학과 예술가의 언어를 법의 언어로 바꾸어 변론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산민 본인도 필화로 옥고를 치르고 권력에 밉보여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그 8년 5개월이란 기간을 한 줄로 요약한 '전(前) 변호사'라는 이력 아닌 이력은 어두운 시대가 안겨준 우습고도 슬픈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를 법의 이름으로 가두었던 판결문 속에 산민의 이름과 그의 변론은 지금도 등대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나치 정권이 추방했던 독일의 법철학자 라드브루흐(Gustav Radbruch)는 문학은 인생을 예찬하고 법학은 인생을 비판하지만 둘의 공통점은 인생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산민 선생은 평생을 통해 법(정의)과 사랑을 실천하셨다. 부디 편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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