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물류가 교차하는 곳엔 돈이 모인다. 돈이 오가는 곳에서 예술은 꽃을 피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는 예나 지금이나 그런 장소다. 지중해 무역을 지배했던 베네치아 공화국(697~1797) 시절에는 르네상스의 대표 화가 티치아노를 비롯한 거장들이 ‘물의 도시’ 곳곳을 수놓았다. 1895년 세계 최대 미술전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창설된 뒤에는 현대미술이 더해졌다. 베네치아는 그렇게 서양 중세·르네상스 시대 미술 및 건축의 정수와 국제 미술의 최신 조류를 나란히 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시공간이 됐다.
세계 미술시장을 주무르는 거물들이 비엔날레 기간 대부분을 본 전시장과 각 국가관 밖에서 보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내 곳곳의 유서 깊은 고성과 고택, 성당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비엔날레 병행 전시와 개인전이 줄지어 열리기 때문이다. 동시대를 대표하는 현대미술 작품들이 수백년 역사를 지닌 공간과 옛 거장들의 벽화·천장화, 창밖의 운하 풍경과 어우러져 연출하는 장관은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그중에서도 단색화 거장 하종현 화백(87)의 대규모 회고전은 가장 주목받는 전시 중 하나다. 국제갤러리와 티나킴갤러리가 주최하고 ‘국가대표 큐레이터’로 불리는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이 기획했다. 본 전시장과 떨어진 대학가에서 열렸지만 먼 길을 걸어온 관람객이 줄을 잇는다. 전시장에서 만난 60대 덴마크인 부부는 “비엔날레 전시보다 하종현 작품을 직접 보고 싶어서 베네치아에 왔다. 거리도 멀고 자가격리 규정이 부담돼 한국에 가지 못했는데, 작품을 직접 보니 감동적”이라고 말했다.
전시장은 수백년 된 고택 팔라제토 티토. 리처드 해밀턴과 오노 요코, 알렉스 카츠 등 유명 예술가들의 전시를 주최해온 세계적인 미술재단 ‘베비라콰 라 마사 재단’이 소유하고 있다. 재단 측이 하 화백에게 먼저 연락해 ‘대관료도 필요 없으니 작품을 걸어달라’며 전시를 제안했다. 하 화백이 199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한국관 대표작가로 참여했을 당시 국가관도 없이 이탈리아관 구석을 빌려 작품을 걸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이번 전시는 하 화백의 1962년 초기작부터 올해 최신작까지를 망라했다. 그의 전매특허는 마대 뒷면에 물감을 바른 뒤 밀대로 짓이겨 물감을 밀어내는 배압법(背押法). 이렇게 만들어낸 그의 ‘접합(Conjunction)’ 연작처럼, 단색조 작품들은 ‘배어나온 듯’ 전시장과 자연스레 어우러진다. 도시화 과정에서 사라져 가는 전통을 되살린 1967년 작 ‘도시계획백서’, 철사와 철조망을 이용한 1974년 작품 등을 통해 그의 예술세계를 폭넓게 감상할 수 있다.
아드리아해가 내려다보이는 고택 팔라초 카보토에서는 최근 세계 미술시장에서 인기가 급상승 중인 실험미술가 이건용(80)의 개인전 ‘신체풍경’이 열린다.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는 화가의 성격처럼 신작만 20여 점을 내놨다. 그의 ‘바디스케이프(Bodyscape)’ 연작은 베네치아의 빛깔을 담아내 주목받고 있다. 캔버스 정면 대신 뒤쪽에서 작가의 팔이 닿는 데까지 붓질해 화면에 흔적을 남겼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반타블랙을 사용한 여러 작품을 보란 듯이 펼쳐냈다. 앞에서 보면 평면이지만 옆에서 보면 갖가지 모양으로 불룩 튀어나온 형상이 탄성을 자아내는 설치작품들,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도료를 마구 사용해 섬뜩한 느낌을 주는 거대한 설치작도 전시장에 나왔다. 마치 ‘싫어할 테면 싫어해 보라’는 듯하지만, 각 전시장 앞에는 작품을 감상하려는 관객들의 긴 줄이 연일 늘어서 있다.
산 지오반니 에반젤리스타에서 열리는 설치미술 거장 우고 론디노네의 ‘번 샤인 플라이(burn shine fly)’는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매력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전시다. 1300년대 베네치아 형제회가 집회소로 건립한 이곳 천장에는 구름무늬 표면을 한 인간의 형상들이 마치 날아다니는 것처럼 매달려 있다. 현대미술과 화려한 프레스코 벽화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전시 기획자인 하비에르 몰린스는 “이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삶의 경이로움과 신비를 느끼게 한다”고 설명했다.
베네치아=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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