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그러니 날씨의 속삭임을 흘려듣지 마라

입력 2022-04-26 17:05   수정 2022-04-27 01:32

날씨는 우리의 원초적 미의 경험이고, 내 안에서 증식하는 무모한 희망이며, 때로는 거쳐야 할 고통과 시련의 터널이다. 날씨가 우호적이라면 우리 인격은 지금보다 더 고결하고, 삶은 더 윤택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날씨는 내 편이 아니었다. 내 인생을 망친 건 날씨야. 내가 이렇게 말하자 당신은 웃었다. 날씨에 대한 내 진지함이 과민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햇빛·비·바람은 창의력 자극제
날씨는 지구 환경이 베푸는 경이로운 보상이고, 실존의 형태를 결정짓는 거푸집이다. 날씨라는 변수가 없다면 우리 삶은 지금보다 더 단조롭고 밋밋했을 테다. 날씨는 늘 시와 음악과 그림 같은 예술 창작의 촉매제였다.

하지만 날씨는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 것들 중 하나다. 땅의 질서를 만드는 이 변화무쌍한 날씨 앞에 인간은 한낱 추구(芻狗)에 지나지 않는다. 이 얘기를 듣고 있던 당신은 또 웃었다. 당신은 내가 날씨에 미친 사람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모든 날씨는 현재를 산다. 날씨는 우리 감정의 안쪽에 다양한 무늬를 새기는 ‘자연의 맥박’이다. 우리가 오감으로 만나는 날씨는 늘 현재에서 그 생생함을 키우고 번성한다. 우리는 비와 눈을 혀로 맛보고, 햇빛의 냄새를 코로 맡으며, 살갗을 간질이는 것을 촉각으로 느끼고, 폭풍의 함성을 고막으로 듣는다. 현재가 아니라면 날씨는 유효기간이 끝난 음악회 티켓같이 그 용도를 잃는다.

봄날의 밝은 햇빛으로 녹색 잎들은 반들거리고, 이끼와 잔디는 파랗게 자란다. 햇빛은 모든 생명체의 골수에까지 파고들어 양기를 북돋우며 생육과 번성에 기여한다. 햇빛은 땅속 구근이나 씨앗을 격려해 싹을 틔우고, 새나 야생 짐승들이 짝짓기를 하게 하고 번식으로 이끈다. 18세기 사람들은 햇빛이 해롭다고 여겼지만 햇빛은 삶을 선물로 바꾼다.

비는 어떤가? 풍부한 강수량은 곡식 수확량을 늘려 인류의 생존에 큰 보탬이 되지만, 필요 이상으로 넘치는 비는 주택이나 농경지 침수를 일으키고, 땅에 묻은 감자가 싹이 나지 않은 채 썩게 해서 한 해 농사를 망친다.

비는 심술궂다. 어린 시절 소풍이나 운동회 날엔 비가 내려 행사들이 취소되었다. 그 실망감이라니! 비는 야외 결혼식에 훼방질을 하고, 노점상들의 장사를 망친다. 또한 대지를 진흙탕으로 만들어 보병의 전진을 더디게 하고, 작전 수행을 지연시킨다. 결과적으로 비는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전쟁의 패배를 불러온다. 이렇듯 비는 불의와 독선으로 자주 물의를 일으킨다.
'날씨 암호' 해독해야 천하제패
인간의 모든 기다림은 날씨 안에서의 기다림이다. 인간은 날씨 안에 서 있고, 날씨에 의해 지배되고 포박되는 존재다. 그런 점에서 날씨는 삶의 상수다. 눈, 비, 우박, 구름, 바람, 햇빛, 안개, 추위, 얼음, 이슬, 서리… 같은 기상 현상들은 신체의 자기수용성 감각에 관여하고, 생체 리듬과 꽤 깊은 상관관계를 맺는다.


날씨는 야외 행사, 노동의 성과, 인간관계 따위에 두루 작용한다. 이를테면 비와 안개와 바람은 예술가의 창의력을 자극하고, 위생과 복지와 주택설계에 영향을 미치며, 혹서와 혹한은 시련을 안기는 것과 동시에 삶을 견디고 견인주의를 학습할 기회를 준다.

날씨를 만드는 건 기우제나 부활절 미사가 아니고, 소금이나 후추 따위도 아니다. 날씨는 저 먼 데서 온다. 날씨는 태양의 흑점이나 태양풍, 별자리의 변화같이 복합적인 요소들로 빚어진다. 자연의 순환과 계절에 따라 낮과 밤의 길이가 달라지고, 기온의 편차가 생긴다.

바다 해수면의 온도나 극지방 유빙들의 상태, 지역의 지형지물도 기류와 날씨에 영향을 미친다. 밀크셰이크를 제조하듯 누구도 날씨를 간단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우리에게는 날씨를 빚을 능력도 결정권도 없다. 오로지 순응만이 있다.

아침에 눈 뜨면 ‘안녕!’하고 인사를 건네는 게 바로 날씨다. 우리는 하늘이나 구름을 보고 그날의 날씨를 예측한다. 안타깝게도 죽은 자들은 날씨의 특수를 누리지 못한다. 날씨는 산 자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화창한 날씨는 화창해서 좋았고, 불순한 날씨는 불순한 대로 좋았다. 날씨로 인해 나는 덜 외로웠고, 내 소규모 삶은 덜 지루했다.

인간은 날씨를 제 뜻대로 하지 못하고 그것이 초래하는 불편에 소심하게 대응한다. 양산은 자외선에서 피부를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고, 우산과 우비는 흩뿌려지는 비의 심술에 대한 소심한 저항이다.
번개같이 내리꽂히는 영감을
바람은 산불을 키우고, 기상 변수는 인류 생존을 위협한다. 날씨는 인류가 풀어야 할 암호와 같다. 이 암호를 해독한다면 천하를 다 가질 수 있다. 태풍, 홍수, 가뭄 따위는 무시무시하고, 난폭하며,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이 세다. 우리를 너끈히 때려눕힐 만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내 인생이 그나마 순탄했던 것은 날씨가 좋았기에 가능했다. 좋은 삶은 좋은 날씨가 주는 자양분 속에서 빚어진다. 우리는 그 단순한 사실을 자주 놓친다. 모든 날씨들아, 고맙구나! 우리의 행복과 평안은 모두 날씨 덕분이다. 지난 300년 동안 인류가 잘살았고, 문명 건설에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지구 날씨가 큰 변덕을 부리지 않고 좋았기 때문이다.

날씨는 날마다 배달되는 사건이자 흥미진진한 드라마다. 이 날씨를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지루할 틈이 없다. 날씨는 우리보다 앞질러 미래를 살며 미래를 선포한다. 그러니 날씨의 속삭임과 중얼거림을 흘려듣지 말라. 시인은 날씨에서 영감을 얻고, 기업가는 신사업에 대한 착상을 얻는다.

수면 리듬이나 체온, 호르몬 분비에 변화를 낳고, 생물학적 변수를 빚는 날씨에 투자하라! 지구가 태양계를 도는 행성의 지위를 내려놓지 않는 한 날씨는 무한자원에 가깝다. 날씨를 쓰자. 이 무한자원을 흘려보내는 건 낭비다. 날씨를 살피며 상상력을 살찌우고, 번개같이 내리꽂히는 영감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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