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어느 가을날, 당시 전도유망했던 화가 박시현(57·Park si hyun)은 중국 예술의 중심지인 상하이로 여행을 떠났다. 한국 미술의 뿌리를 찾으려면 동양미술의 본산인 중국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첫 개인전 직후 여행 보따리를 쌌다. “평생 예술가로 자유롭게 살겠다”던 다짐은 사랑 앞에 무너졌다. 여행지에서 만난 한국 유학생과 사랑에 빠진 그는 이듬해 식을 올린 뒤 상하이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몇 년 뒤엔 세 아이의 엄마가 됐다.
영원할 것 같았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결혼 7년 만인 2002년, 남편에게 ‘간암 말기’ 선고가 내려진 것. 1년 뒤 남편은 평생 가꾼 중소기업과 세 아이를 아내에게 맡기고 떠났다. 경영의 ‘경’ 자도 모르던 화가는 졸지에 ‘사장님’이 됐다. 그것도 연고도 없는 상하이에서.
박시현은 강했다. 아이도, 회사도, 억척스럽게 챙기고 돌봤다. 그렇게 5년을 정신없이 보냈다. 회사는 남편이 맡겼을 때보다도 커졌고, 아이들도 곧게 자랐다. 그러자 잊고 있었던 ‘화가 본능’이 되살아났다. 다시 붓을 들었다. 인생의 곡절을 담은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5년 뒤에는 아예 회사를 정리하고 전업 작가로 돌아왔다.
이런 자신의 인생사를 소재로 그린 그의 작품은 영국 런던 사치갤러리에 소개되는 등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박 작가의 작품 28점을 묶은 초대전 ‘Confession’(고백)이 3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개막한다.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아내며 얻은 깨달음과 내면의 변화를 표현한 작품들이다. 그는 마치 수행하듯 캔버스에 붓으로 선을 긋고, 나무토막이나 신문지 등 오브제를 붙인 뒤 화면에 바느질을 한다.
“예술은 작가의 영혼 한 조각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살아온 인생과 내면을 그대로 화면에 표현했어요. 예컨대 바느질 콜라주는 삶과 죽음의 경계, 상처의 치유를 상징합니다. 작품을 만들면서 제 자신을 치유하는 거죠. 작품을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치유해주기를 바라면서….”
기법적으로 보면 박 작가의 그림에는 수묵화 등 중국화의 영향이 녹아 있다.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1998년 상하이아트페어에 그림을 출품하는 등 결혼 뒤에도 현지 화단과 활발히 교류하며 중국화를 배운 덕분이다. “한국화와 중국화가 결합돼서 그런지 독창적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아요. 특히 서구권에서 반응이 좋습니다. 컬러나 구성이 동양적이면서도 참신하다고 하더군요.”
미국과 유럽에서 주가가 더 높은 그가 한국에서 활동하게 된 배경에도 ‘드라마 같은’ 사연이 숨어 있다. 2020년 3월 미국에 작업실을 구한 뒤 상하이에서 미국행 비행기로 환승하기 위해 인천국제공항에 들렀다가 코로나19 때문에 발이 묶인 것.
“하필 그때 미국과 중국 모두 강력한 입국 제한 조치를 시행해 환승차 들른 한국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이것도 운명이다’ 싶어 아예 한국에서 작업실과 거처를 구했죠. 그 덕분에 26년 만에 한국에서 개인전을 열게 됐습니다.”
“앞으로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활동할 계획”이라는 박 작가는 이번 전시 수익금의 일부를 우크라이나 대사관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세상의 도움이 없었다면 ‘화가 박시현’은 없었을 겁니다. 남편이 떠난 뒤에도 큰 문제 없이 회사를 이끌었던 거나, 아이들이 잘 자라준 거나, 저 혼자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니었거든요. 제가 다시 붓을 들 수 있었던 건 모두 주변의 도움 덕분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기부를 더 늘려갈 생각입니다.”
그에게 ‘왜 하필 우크라이나를 택했냐’고 묻자 “지금 가장 도움이 필요한 곳 아닌가요?”란 답이 돌아왔다. 전시는 오는 26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