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순식간에 ‘봐주기 수사’ 프레임을 내걸더니 검수완박 역공을 펼쳤고, 그로부터 한 달도 안 돼 입법이 완료됐다. 공청회 한 번 없이 번갯불에 콩 볶듯 끝내버린 기막힌 즉흥 입법이다. 불과 1년 전에 시작된 검경수사권 조정도 ‘낙제점’이라는 혹평이 쏟아지고 있는 터다. 그 부작용을 모르쇠하고 수사권 조정의 끝판왕 격인 검수완박으로 폭주한 건 어떤 명분을 붙여도 정당화하기 힘들다.
한국 국회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치유 불가 수준이다. ‘정인이법’도 생후 16개월 된 정인이가 양부모 학대로 숨졌다는 TV 보도로 여론이 들끓자 불과 6일 만에 뚝딱 해치웠다. 그 짧은 기간에 함량 미달 법안이 쏟아져 발의안이 37개에 달했다. 정인이법 통과 후 수십 명의 의원이 ‘자신의 공’이라며 공치사하고 나선 배경이다. 하지만 졸속 입법 탓에 구멍이 숭숭 뚫린 법이라는 비판이 거세지자 불과 한 달 만에 재개정하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졌다.
‘가덕도신공항 특별법’은 입법 테러에 가깝다. 가덕도는 2016년 평가 때 ‘동남권 신공항’ 후보지 세 곳 중 최저점을 받았다. 그런데도 여당은 지난해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한 달여 앞두고 특별법을 급조해 전격 의결했다. 정해진 절차를 밟아 국책사업으로 진행되던 ‘김해공항 확장안’은 백지화되고 말았다. 가덕도공항은 ‘표’를 최우선하는 여야의 담합 속에 지난주 국무회의에서 마지막 관문인 예비타당성조사 면제를 확정받았다.
20대 국회에서 상임위원장을 지낸 한 중진의원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법이 아니라 의원들을 위한 법 만들기가 국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국민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갖은 편법과 꼼수를 총동원하고 있다는 고백이다. 민의의 전당에서 민주정치의 원리가 실종됐다니, 분노를 넘어 두려움이 엄습한다.
날림 입법은 갈수록 대범해지고 있다. 법안 공동발의에 참여할 때 사전검토조차 없이 도장만 빌려주는 행태가 일반화됐다. 카톡이나 텔레그램으로 연락받아 법안 이름만 확인하고 공동발의를 승낙하는 방식이다. 20대 국회 법사위원을 지낸 한 여당 의원은 “법안을 읽지 않고 상임위원회에 참석할 때가 많다”고 했다. 공동발의자로 참여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상임위 표결에서 해당 법안에 ‘기권’하거나 ‘반대’하는 사례도 목격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회발 입법은 말 그대로 홍수다. 20대 국회 4년 동안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은 2만3047건으로 20년 전 15대 국회(1996~2000년·902건)의 26배에 달한다. 정부 발의 건수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변화가 없는데 의원 발의만 수직 상승세다. 전체 법안 중 의원 발의안 비중도 15대 국회 때 59%에서 20대 때는 95%까지 치솟았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내용을 중복하고 쪼개서 발의하거나, 병합 심사를 유도해 입법 반영 건수를 높이는 등 갖은 편법이 판친다. 문구나 표기를 고쳐 개정법안을 발의하는 실적 부풀리기도 넘쳐난다. ‘판명된’을 ‘밝혀진’으로, ‘경과된’을 ‘지난’으로, ‘공익상’을 ‘공익을 위하여’ 등으로 고치는 꼼수들이다.
요즘 국회에서 통과되는 법안은 한 해 2200건 정도로 주요 선진국을 압도한다. 영국의 31건과 비교하면 무려 71배다. 프랑스는 88건, 일본도 112건에 불과하다. 독일과 미국 역시 각각 136건과 193건에 그친다. 의원 한 명이 임기(4년) 동안 통과시키는 법안도 한국이 평균 29.3건으로 가장 많다. 영국은 0.2건, 프랑스와 일본도 나란히 0.6건에 불과하다. 독일 미국 역시 각각 0.8건과 1.4건에 그친다.
한국 국회는 한마디로 ‘발의는 과다, 숙의는 과소’ 상태다. 입법 경쟁이 불붙다 보니 하루에 199건이 통과되는 진기록(2019년 12월 10일)까지 나왔다. 작년 한 해 제정된 법령(법률·대통령령·총리령·부령)은 170개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정부별로 따져봐도 급증세가 뚜렷하다. 규제개혁 차원에서 법령 통폐합에 나선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법령 수는 337개 감소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376개 증가로 반전하더니 문재인 정부 들어선 534개(5월 2일 현재)나 급증했다. 이른바 ‘진보 정부’에서 규제 입법이 넘치는 현상도 주목된다. 문재인 정부에서 의원 발의된 규제 법안은 4135건으로 직전 박근혜 정부(988건) 때보다 4배 이상 많다.
덜컥 입법한 뒤 ‘이제부터 이게 법이니 알아서 하라’라는 식의 독선적 입법 만능주의도 극성이다. ‘임대차 3법’도 그런 부류다. ‘투기를 근절하겠다’며 밀어붙인 임대차 3법은 많은 전문가의 우려대로 전·월세 폭등을 불렀다. 주택시장을 3중 가격 4중 가격이 횡행하는 지하시장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무지한 입법부가 서민을 저격하고 만 결과다.
‘강하게 처벌할수록 좋은 법’이라는 식의 형벌 만능주의적 과잉 입법도 넘친다. 누구도 지킬 수 없는 법을 만든 뒤 엄벌하겠다고 으름장 놓으니 부작용 속출은 예정된 수순이다. 세계 최강의 처벌 조항을 둔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난 1년간 근로자 사망은 오히려 늘었다. 보여주기식 처벌로 분풀이하는 데 치중한 부실 입법의 뼈아픈 역설이다. 스쿨존 내 교통사고를 가중처벌하는 민식이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운전 과실을 음주운전 사망, 강간 등의 수준으로 과잉처벌해 ‘형벌의 양은 책임에 상응해야 한다’는 형법 원칙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터지며 법의 신뢰를 추락시켰다.
가덕도신공항 특별법을 보면 입법이 공정과 정의를 구현하기는커녕 불공정과 부정 확산의 수단으로 타락했다는 의구심이 확신으로 바뀐다. 가덕도공항은 사전타당성 검토에서 비용 대비 편익이 ‘0.51~0.58’로 분석됐다. 이용객이 없어 부실화한 전남 무안공항(0.49)과 별 차이 없는 결과다. 그래도 엊그제 국무회의에서는 예타 면제가 확정됐다. 무리수와 반칙으로 점철된 가덕도 특별법은 대한민국 국회의 저열한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입법권은 근대국가를 지탱시키는 핵심 권력이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입법권이 국가의 심장”이라고 갈파했고, 로크도 《통치론》에서 “입법부가 무너지거나 해산되면 국가의 해체와 죽음이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한국 의회는 ‘우리가 만들면 법이니 따라야 한다’는 식의 부적절한 사고에 지배되는 모습이다. 자의적이고 강압적인 입법으로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부실 발의로 법안이 철회되고도 반성조차 없다. 여론의 질타를 받아도 ‘진영의 이익을 위해 온몸을 던졌다’는 그릇된 신념만이 넘친다. 낯 뜨거운 위장 탈당으로 국회법이 정한 절차를 무력화하고 검수완박 폭거를 거든 민형배 민주당 의원이 비장한 어투로 ‘역사’를 들먹이는 게 현실이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오늘날 민주주의는 대부분 ‘합법적 선출’에 의해 파괴된다”고 했다. 승리 지상주의에 빠진 ‘선출된 정치인’들이 권력을 사유화하고, 삼권분립을 훼손하며 사익을 추구하는 행태가 민주주의 최대의 적이라는 지적이다.
지금 한국 상황이 딱 그렇다. 이쯤 되면 국회를 ‘한국 민주주의 파괴의 진앙’으로 불러도 손색없다. 진영의 이익과 스스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싸구려 법을 마구 찍어내는 제왕적 국회가 선진 한국의 최대 걸림돌로 부상했다.
▷‘검수완박’ 사태를 지켜본 소감은.
“국회의 위선과 무지에 실망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찰은 군대처럼 물리력 행사가 본령이다. 경찰의 수사 전담은 부적절하며, 대안이라고 제시한 ‘한국형 FBI’도 위험한 접근이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엄밀히 보면 정보 조직인데 제도와 역사가 다른 한국에 접목하는 건 상당한 모험이다. 검찰에 수사권을 주지 않는 나라가 거의 없는데도 여당은 검수완박이 글로벌 스탠더드라며 폭주했다.”
▷한국에서 의원 입법이 많은 이유는.
“역설적으로 국회에 대한 대규모 지원을 이유로 들 수 있겠다. 외국은 의원 보좌진이 1~2명이지만 한국은 10명까지 둔다. 그러다 보니 법에 무지한 보좌진을 중심으로 마구잡이 입법이 이뤄진다.”
▷날림·부실 입법을 막을 방법은.
“입법을 진중하게 대하는 의원들의 인식 전환이 필수다. 예컨대 ‘전통무예진흥법’은 6~7개 조항이 전부다. 그 정도면 관련 기본법에 넣는 게 상식적이다. ‘의원이라면 제정법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빗나간 공명심이 작용했을 것이다. 시민단체의 감시 강화도 시급하다.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는 친구의 별장에 놀러간 일을 시민단체가 고발한 것을 기화로 실각했다.”
▷제도적 개선책은 뭐가 있나.
“법안 발의 최소 기준을 의원 20명에서 10명으로 줄였는데, 20명으로 돌아가는 게 맞을 듯싶다. 전문가 참여, 공청회 등 입법 품질 확보 절차도 강화해야 한다. 독일은 법조문이 문법적으로 맞는지 점검하는 절차까지 거친다. 주권 국가의 최종 책임자인 국민의 책임 의식이 부족하다. ‘과잉·부실 입법은 내 권리 침해’라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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