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러시아는 세계 최대 밀 수출국이다. 농업 후진국이던 러시아가 밀 생산량을 빠르게 늘린 건 역설적으로 봉쇄의 결과물이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름 반도 침공으로 서방의 제재가 단행되고, 그 해 후반에 유가가 폭락했다. 석유 수출에 의존하고 있던 러시아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루블화의 가치가 떨어지자 소비자들은 치솟는 수입품 가격에 맞닥뜨려야 했고, 자연스럽게 러시아산 상품으로 눈을 돌렸다. 농민들은 제재로 인한 보호 무역의 효과를 누렸다. 러시아의 농업 종사자들은 이 시기에 광범위한 농업개혁을 단행, 결과적으로 밀 생산량을 배가시켰다. 푸틴은 한 손에 무기를 들고 전쟁을 일으켰지만, 그의 또 다른 손에 들린 건 세계 시장을 주무를 수 있는 원자재다.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푸틴은 히틀러를 닮았다. 다른 건 히틀러의 실수를 답습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서진(西進)의 와중에 동진을 감행해 소련(USSR)과 상호 대학살극을 벌였다. 자원을 분산시켰다. 푸틴의 전략은 명백히 동진이다. 그는 오랜 숙적인 중국을 새로운 가스 판매처이자 반(反)달러 동맹의 강력한 우군으로 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동부 영토를 병합하려는 것은 일종의 성동격서 전략이라고 봐야 한다. 흑해의 재해권을 장악함으로써 아제르바이잔 등을 통한 유럽의 에너지 대안 루트에 압력을 가하겠다는 실용적인 목표 외에 푸틴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인 우크라이나에 확실한 서쪽 방어벽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이해찬 대표가 어떤 배경에서 발언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북한을 관통하는 천연가스관이란 구상과 관련해 집권 여당이 진심이었던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선 직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도 올 2월 이해찬 대표 때와 똑같이 쿨릭 주한 러시아 대사와 면담한 뒤 공개 발언 말미에 “가능하면 천연가스도 배로 실어 오는 게 아니라 가스관으로 신속하고 저렴하게 도입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속단하긴 어렵지만, 러시아의 동진 정책과 문재인 정부식 한반도 평화 방안을 연결하겠다는 계산법이다.
청와대와 집권 여당의 구상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는 독일과 유럽의 지난 몇 년간의 에너지 다변화 전략만 봐도 알 수 있다. 독일을 포함해 유럽은 가스관을 통한 러시아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배로 실어 오는’ LNG를 가스로 바꾼 뒤 유럽 내 가스관을 통해 필요한 지역으로 보내주는 처리시설을 계속 짓고 있다. 게다가 LNG는 미국의 최대 에너지 수출 품목 중 하나다. 간혹 푸틴을 추켜세우며 친러 행보를 보여왔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조차 2019년에 독일의 노르트 스트림2 건설을 제재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이는 미국이 러시아발 가스관을 ‘국가적 이익’ 차원에서 다루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연 우리 정부는 중·러가 주도하는 반미 연합에 진정 동참하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에너지 무지로 인한 과대망상이었을까. 그나마 후자였길 바랄 뿐이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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