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비어 있으나 꽉 차 있다.’
한국 단색화는 이 한 문장으로 표현된다. 우리 단색화가 세계 미술계에서 하나의 장르로 인식된 건 이제 약 10년. 단색화는 원래 영어의 모노크롬(monochrome)을 한글로 옮긴 것에 불과했다. 그동안 단색조 회화, 한국의 모노크롬, 한국적 미니멀리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지난 10년간 한국 단색화의 예술적 가치는 뒤늦게 다시 평가받았다. 이제 단색화는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 장르이자 하나의 고유명사가 됐다. 세계 어디를 가도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I love Dansaekhwa(단색화).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이라고 똑똑히 말한다. 지난달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만난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이사이자 이름난 ‘큰손’ 컬렉터 론티 이버스 아만트재단 대표도 그랬다.
50년이 걸렸다. 단색화가 단색화로 불리기까지. 한국 단색화는 하나의 혁명이었다. 1970년대 정부 주도의 국전을 거부하고 ‘아방가르드’를 이끈 일련의 전위부대 작가들에 의해 시작됐다. 이는 어떤 동일한 목적의식을 가진 미술운동 차원이 아니었다. 화가 각자가 자신만의 형식으로 작품 행위를 했다. 내용과 주제, 선, 형태를 모두 거부했다. 애초에 형식과 질서를 추구하는 전통적 미술에 대한 반발로 시작됐다. 그들은 아무리 비판해도 생각을 굽히지 않았고(정상화), 안 팔려도 죽어라 그렸다(하종현).
한국 단색화가 서양의 그것들과 다른 지점은 명료하다. 윤진섭 미술평론가의 말처럼 우리 단색화는 ‘물감을 쌓고 뜯어내고 점을 찍는 등 작가의 신체를 이용해(촉각성) 반복적인 작업(행위성)을 하고, 이를 통해 정신을 수양하고 탐구하는(정신성)’ 미술로 정의된다. 도공이 물레를 돌리고 석공이 돌을 자르듯 묵묵히 수행하는 한국적 정신인 셈이다. 그 정신이 낳은 색과 질감은 검정도 같은 검정이 아니고, 하양도 같은 하양이 아니다.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텅 빈 듯 가득 채운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 단색화를 세계 무대에 올려놓은 1세대 단색화가 박서보 화백은 그래서 위대하다. 그가 “그 오랜 시간 단색화의 중심을 잡아준 덕분”(이우환)에 일본을 시작으로 세계 미술계에 한국의 정신을 알릴 수 있었다. 90세를 넘긴 박 화백을 그의 자택이자 작업실인 서울 연희동 ‘기지’에서 만났다.
대한민국 1세대 단색화 거장…"단풍色 화폭에 담으니, 새가 날아와 쪼아먹더라"
올해 초 박서보 화백(91·사진)은 뜻밖의 요청을 받았다. 수년 전 국내 화랑을 통해 그림을 사 갔던 아랍에미리트(UAE) 부호가 그림 수리를 요청한 것이다. 빨갛게 물든 단풍색을 담아낸 그림이었다. 사진을 보니 작품 한구석이 누가 물어뜯은 것처럼 뜯겨져 있었다. ‘자식 같은’ 그림이 다쳤다는 안타까움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어지는 설명에 너털웃음이 나왔다.
“그림이 걸린 방의 창문을 잠깐 열어 놨는데, 새가 날아들어 와 허겁지겁 쪼아 먹더군요. 맛있는 열매인 줄 알았나 봅니다.”
지난달 서울 연희동 기지재단에서 만난 박 화백은 최근 겪은 일화로 말문을 열었다. 나무 벽화가 얼마나 사실적인지 새들이 부딪혀 죽었다는 통일신라시대 화가 솔거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다. 게다가 박 화백의 작품은 뚜렷한 형태가 없는 추상화.
“기꺼이 수리해준다고 했어. 새를 속이다니, 그 누구의 칭찬보다 기분이 좋아.”
구순을 넘긴 박 화백은 국내외에서 끊임없는 찬사를 받고 있다. 한국 단색화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최고 인기 작가로, 후학과 사회를 위한 기부를 아끼지 않는 ‘미술계 큰 어른’으로. 두 시간 동안 이어진 인터뷰에 그는 자신의 예술관과 지나간 인생사를 또박또박 풀어냈다. 봄꽃을 닮은 노란색 의상과 같은 색의 마스크는 그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또 하나의 작품이었다.
묘법의 개념이 박 화백 머릿속에 떠오른 건 1955년이다. 홍익대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그는 ‘최고 화가’를 꿈꿨다. 그러려면 최고의 그림을 봐야 했다. 고구려시대 거장 담징이 그린 벽화를 보기 위해 충남 수덕사를 찾았다. 숙소인 수덕여관에 마침 1920년대 신여성을 대표하는 문인이자 승려인 김일엽(1896~1971)이 있었다.
“아버지가 독실한 불교 신자셨어. 좋은 예술가가 뭔지 승려에게 한번 물어보고 토론해야겠다 싶었어.”
첫 대화는 실망스러웠다. 김일엽은 ‘수신(修身)하라’ ‘자신을 비우라’는 선문답을 이어갔다.
“이 사람도 엉터리구나 싶더라고. 그래서 곯려줘야겠다는 생각으로 ‘당신은 부처님을 자주 만나냐’고 물었어. 그런데 돌아온 답이 ‘자주 만나는데 그게 나였다’는 거였지. 머리가 띵했어. ‘결국 답은 내 안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
하지만 이때의 깨달음을 화폭에 구현하는 건 쉽지 않았다. 12년이 흐른 뒤에야 그 방법을 잡아낼 수 있었다. “네 살배기 둘째가 형이 글씨를 쓰는 걸 보고 흉내를 내더라고. 방안지 칸에 글자를 적으려는데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거야. 제풀에 화가 나서 종이에 마구 연필을 휘갈기더라고. 이게 바로 체념의 몸짓이구나, ‘비움’이구나 싶었어.” 그렇게 ‘전설’은 시작됐다.
동양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봤다. 인물화나 초상화가 아니라 산수화가 동양 미술의 주류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술은 수신(修身)의 수단이었다.
“선비가 사군자를 치는 것처럼, 단색화는 자기 안으로 수렴하는 수신의 예술이야. 20세기까지 세계를 호령하던 서양 미술은 ‘발산의 미술’이고. 서양 시각에서는 단색화의 정신이 참신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
이렇게 만들어낸 ‘수렴의 예술’은 보는 이의 고통과 번뇌를 빨아들인다는 게 박 화백의 설명이다.
“그림은 보는 사람의 괴로움을 ‘흡인지’처럼 빨아들이는 역할을 해야 돼. 특히 21세기처럼 스트레스가 많은 시대에는 더욱 그렇지. 이럴 때 서구의 파괴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집에 걸어놓는 건 스트레스를 자초하는 일이야.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을 봐. 그게 어디 그림인가, 폭력이지. 하하.”
다만 아무 단색화나 ‘흡인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색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색이야. 색에 정신의 깊이가 담겨야 해. 예컨대 내 거무스름한 그림은 그냥 검은 색과는 달라. 평생 부엌에서 나무를 때고 밥을 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렸어. 그 연기가 수십 년 쌓여 천장과 벽, 서까래에 거무스름한 자국을 남겼지. 그 색을 그림에 담은 거야.”
2000년 박 화백이 ‘자연색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한 뒤 시작한 ‘컬러 묘법’ 연작도 마찬가지다. 그는 “단색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색”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나는 관념적인 색이 아니라 자연의 색을 그대로 담았어. 단풍이 절정에 달했을 때 시간과 빛의 각도, 공기에 따라 달라지는 색을 유심히 관찰한 뒤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쳐 있는 그대로의 색을 재현하는 식으로. 나는 그걸 ‘그림 속으로 색을 유인한다’고 불러.”
홍익대 미대 교수이자 화가로 자리를 잡은 뒤에도 박 화백은 경제적인 풍요와 거리가 멀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는 오랫동안 ‘안 팔리는’ 화가였다. 2000년대만 해도 그의 작품 경매 낙찰가는 3000만원대를 맴돌았다. 201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 병행전시로 열린 ‘단색화’전이 주목을 받으면서 그의 작품 값이 천정부지로 뛰기 시작했다.
“김창열, 이우환과 달리 내 작품은 늘 찬밥이었어. 외국에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거든. 1975년 미국 진출, 1977년과 1996년 프랑스 진출 등 기회가 많았지만 다 걷어차 버렸어. 한국에서 태어나서 공부하고, 단색화 운동을 해서 세계화를 시켜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지. 그림이 안 팔려도 ‘반드시 내 시대가 온다. 지금 세상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다’고 확신하면서 죽자사자 그렸어. 결국 팔순을 넘어 세계 미술계에서 단색화의 대표 작가로 인정받게 됐지.”
돈이 생기자 그는 기부 행보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올초 후학 양성을 위해 박서보예술상을 제정해 광주비엔날레에 100만달러(약 13억원)를 기부했고, 최근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는 5000만원을 건넸다. 지난달에는 경북 울진, 강원 삼척 등지의 산불 피해 복구를 돕기 위해 서울옥션 자선경매에서 판매한 50호 묘법 판화의 수익금 1억원을 기부했다.
“그림이 돈으로 보이면 타락해. 그래서 필요한 것만 남겨두고 기부하기로 했어. 우크라이나에 기부한 건 전쟁 때 겪은 참혹한 고생이 생각나서야.”
인터뷰 말미에 박 화백은 칠순 기념 출판기념식 때 했던 연설을 떠올렸다.
“지난날 나는 ‘앞에 가는 똥차 비키시오’ 하고 선배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똑같은 후배들의 말이 지금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비켜설 의향이 없습니다. 자신 있거든 추월해 가시구려.”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는 이 말을 덧붙이고 싶다고 했다.
“아직도 할 일은 많은데 해는 저물어 갑니다. 저물라면 저물어야죠. 하지만 나는 나대로 인공조명을 비춰서라도 끝까지 내 할 일을 하겠습니다.”
베네치아=성수영/김보라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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