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은 1960년대 초까지 귀했다. 볼펜 하나 만드는 데 고도의 기술이 요구됐다. 이전까지 연필과 만년필로만 글씨를 써야 했던 한국에서 누구도 선뜻 볼펜 개발에 나서려는 회사가 없었다. 만년필이 주류였던 1963년, 심 끝에 금속 구를 단 국산 볼펜이 등장했다. ‘모나미153’이다. 잉크가 필요 없는 볼펜의 등장은 ‘필기구 혁명’이었다. 누구나 볼펜 한 자루를 들고 다니며 마음껏 쓰고, 마음껏 그릴 수 있는 세상. 이 세상을 연 건 ‘쓰는 것의 혁명’을 가져온 문구기업 모나미의 창업주 고(故) 송삼석 명예회장이다. 1962년 열린 국제 산업박람회에서 일본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볼펜의 편리함에 반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無)에서 有(유)를 창조하는 도전정신으로 세상에 없는 제품을 개발하자.”
제품을 개발하는 데 볼펜 팁(볼펜 앞쪽의 뾰족한 부분)과 금속 구를 정밀 가공하고 잉크의 점도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등 예상보다 훨씬 높은 기술력과 노하우가 요구됐다. 송 명예회장을 비롯한 임직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개발에 몰두하며 장애물을 하나씩 뛰어넘었다.
검은색과 흰색이 조합된 육각 형태의 간결한 디자인이 특징인 모나미153은 회사의 상징이자 사무용품의 대명사가 됐다. 모나미의 전신인 광신화학공업은 모나미153의 성공에 힘입어 1974년 증권거래소에 상장, 사명을 아예 모나미로 바꿨다. 1978년 모나미153의 한 해 판매량은 12억 자루에 이를 만큼 전성기를 달렸다. 지금까지 ‘국민 볼펜’ 자리를 지키며 최근 누적 판매량 44억 개에 육박하는 스테디셀러로 등극했다.
153 피셔맨은 약 100일에 걸친 수작업 공정을 통해 완성됐다. 주재료는 순은을 사용하고 백금 도금으로 표면을 마감했다. 40년 경력의 금속공예 전문가인 손광수 명장이 제작을 주도했다. 모나미는 당시 교황 방한 일정에 맞춰 기획부터 제작까지 총괄하는 전담팀을 구성하기도 했다.
엄마 아빠의 필기구였던 모나미는 요즘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더 열광한다. 1963년 서울 성수동 공장에서 탄생한 모나미의 역사를 담아 지난 2월 성수동에 ‘모나미 팩토리’를 주제로 모나미스토어를 공개하기도 했다. 공장 콘셉트를 살려 브릭, 우드, 메탈 소재를 사용했다. 이곳에선 잉크 랩을 통해 다양한 색상의 잉크를 조합, 나만의 만년필 잉크 DIY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완성된 잉크 레시피는 나만의 이름을 붙여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해두고 그 컬러를 언제든 추가로 살 수 있다.
모나미는 다른 분야와 협업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글로벌 하이패션 브랜드 아더에러와 협업한 ‘블루 펜’ 프리미엄 에디션은 무광 메탈 소재의 모나미153에 아더에러의 시그니처 색상인 제트블루를 적용했다. 정보기술(IT) 액세서리 전문기업 엘라고와 협업한 ‘모나미×엘라고 애플펜슬2 케이스’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조화를 추구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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