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국빈 방문 중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5일(현지시간) 수도 런던의 금융 중심지 시티에서 열린 강연을 통해 "가계의 금융자산을 저축에서 투자로 옮겨 자산소득을 2배로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소액투자비과세제도(NISA)와 같이 개인투자가들에게 주는 세제혜택을 더 늘려 현금과 예금에 묶여있는 가계의 금융자산을 주식시장으로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자산소득은 일을 해서 버는 급여와 달리 예금 이자나 주식의 배당, 부동산 임대료 등으로 벌어들이는 소득이다. 후생노동성 국민생활기초조사에 따르면 2018년 일본의 세대당 자산소득은 15.8엔(약 154원)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자산을 예금으로 갖고 있는데 일본의 예금이자는 사실상 '제로(0)'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자산소득을 2배 늘리겠다는 기시다 총리의 강연이 의미없는 구호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액수가 아니라 일본인의 투자성향을 보다 공격적으로 바꾸겠다는게 발언의 본질이겠지만 이 마저도 2003년 금융청이 '저축에서 투자로'를 슬로건으로 내건 이래 일본 정부가 20년째 반복하는 구호다.
일본인의 자산 소득을 2배 늘리겠다는 기시다 총리의 선언은 작년 9월말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내걸었던 공약을 축소했다는데 보다 의미가 있다는 분석이다. 그는 총재 선거에서 '레이와(현재 일본 연호)판 소득 2배 증가'를 내세워 승리하고, 10월4일 제100대 일본 총리에 취임했다.
'레이와판'이라는 단어에서 추측할 수 있듯 일본인의 소득을 2배로 늘린다는 공약의 원조는 따로 있다. 기시다 총리가 존경하는 정치인이자 그의 계파인 고치회(현 기시다파)의 창립자 이케다 하야토 전 총리(사진)가 처음 '소득 2배 증가' 목표를 내세웠다.
1960년 이케다 당시 총리는 13조엔이었던 일본의 실질 국민총생산(GNP)을 10년 만에 26조엔으로 2배 늘리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일본 경제가 매년 7.2% 성장하면 10년 만에 소득을 2배 늘릴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예상과 달리 일본인의 소득이 2배로 늘어나는데는 4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1956년~1973년 고도 경제성장기 일본 경제가 연평균 9.1% 성장한 덕분이었다. 1960년대 초반 경제성장률은 15%를 넘었다.
일본 정부의 목표대로 경제성장률이 3%로 뛰어오른다고 가정하더라도 목표 달성에는 22년이 걸린다. 집권 여당인 자민당 내에서도 비현실적인 목표라는 비관론이 우세했던 이유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측근인 하기우다 고이치 경제산업상은 공개적으로 "레이와 시대에 일본인의 소득을 2배로 늘리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기시다 총리는 취임 직후인 10월말 치러진 국회 중의원 총선 유세 기간에는 '소득 2배 증가' 목표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기시다 내각이 간판 경제정책인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하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구체화하는 방안을 잇따라 내놓고 있지만 소득을 2배로 늘린다는 내용은 빠져 있었다.
자민당 총재 선거 이후 기시다 총리가 반 년여 만에 내놓은 새로운 목표가 현재 4만113달러(약 5080만원)인 소득 대신 15.8엔인 자산소득을 2배 늘리겠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30년'의 현실과 타협한 결과로 해석된다.
62년 전 이케다 총리가 '10년 안에 소득을 2배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했을 때도 현실성 논란이 있었다. "실현이 안되면 물러나라"는 야당의 비판에 이케다 총리는 "정치 자체를 그만두겠다"고 받아쳤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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