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상여금에 '지급일에 재직하는 근로자에게만 지급한다'는 '재직 조건'을 두고 있는 경우에도 통상임금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고등법원 판결이 또 나왔다. 최근 하급심들이 이 같은 취지의 판결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대법원의 기존 법리를 흔들고 있어서, 통상임금을 둘러싼 법원의 흐름이 심상치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다수의 대기업들은 기존 대법원 법리에 따라 재직 조건을 통해 상여금이 통상임금으로 인정되는 것을 막아 왔다. 이 때문에 대법원에서 법리가 뒤집힐 경우 산업 전반에 큰 파급효가 예상된다는 분석도 나온다.
서울고등법원 제1민사부(재판장 전지원)는 지난 4일 금융감독원 전·현직 근로자 1832명이 금감원을 상대로 제기한 임금 청구 소송에서 이 같이 판단한 후 1심 뒤집고 근로자 측의 손을 들어줬다. 이 판결이 확정될 경우 금감원은 근로자들에게 86억원을 추가로 지급해야 한다.
원고 근로자들은 "정기상여금, 평가상여금, 선택적 복지비 등은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며 "그럼에도 금감원을 이를 제외하고 통상임금을 계산한 후 이를 기초로 시간외 수당 등을 지급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금감원은 이를 포함해서 통상임금을 다시 계산하고, 이에 따라 시간외근무수당, 연차휴가보상금 등 수당을 다시 계산한 다음 부족분을 추가 지급해 달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연장·야간·휴일근로, 연차휴가 보상금 등 각종 수당은 통상임금을 베이스로 정해진다. 정기상여급 산입으로 통상임금이 커지면 회사가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수당도 커질 수밖에 없다.
원고 중 퇴직 근로자들도 "높아진 시간외근무수당을 바탕으로 퇴직금도 다시 계산해서 퇴직연금에 추가 납입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금감원 측은 "임금 규정에서 상여금 지급에 대해 '지급 시점에 재직 중인 자에 한해 지급한다'는 '재직 조건'을 두고 있다"며 "따라서 정기 상여금은 '고정성'이 없어 통상임금이 아니다"라고 맞섰다.
대법원은 지난 2013년 통상임금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고정성'을 통상임금의 핵심 요건으로 내건 바 있다. 고정성이란 소정 근로를 제공하기만하면 별도의 추가 조건 충족 없이 당연히 지급되는 성질을 말한다. 이를 기초로 대법원과 주류 판결은 그간 '재직 조건'이 있는 상여금은 근로제공 외에도 '재직'이라는 추가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에 '고정성'이 없으므로 통상임금이 아니라고 판단해 왔다.
결국 이번 재판에서는 '재직 조건'을 두고 있는 금감원의 정기 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해줘야 하는지가 쟁점이 됐다.
원고 근로자들은 재직자 조건 자체가 무효라는 주장을 펼쳤다. 근로자들은 "정기상여금에 부가된 재직자 조건은 지급일 전에 퇴직하는 근로자에 대해 이미 제공한 근로에 상응하는 부분까지도 지급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해석되는 한 무효"라고 주장했다. 이미 제공한 근로에 대한 대가라면 받을 권리가 있는데, 재직자 조건이 붙었다는 이유로 임금을 지급하지 않을 수 있다는 해석은 불합리하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1심 법원은 근로자들의 주장을 기각했다. 재판부는 "사용자와 근로자는 합의를 통해 임금의 액수, 지급조건, 지급형태 등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고, 정기상여금에 재직 조건을 두는 것은 강행법규나 공서양속 등에 반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며 "재직 조건이 부가된 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해당하지 않는다"라고 판단했다. 기존 대법원 등의 법리와 결을 같이 한 것이다.
재판부는 "그날그날의 근로제공으로 그 몫의 임금이 이미 발생했는에도 지급에 관한 조건(재직 조건)을 부가해 지급일 전에 퇴직하는 근로자에 대해서는 이미 제공한 근로에 상응하는 부분까지도 지급하지 않는 것은 근로제공의 대가로 당연히 지급 받아야 할 임금을 사전에 포기하게 하는 것"이라며 "이는 임금을 직접 근로자에게 전액 지급해야 한다고 정한 근로기준법 제43조에 반하며, 근로기준법에서 정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근로조건을 정한 근로계약으로서 같은 법 제15조에 의해 무효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기상여금은 근로자의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게 하는 수단이자 생계유지의 근간이 되는 기본급에 준하는 임금"이라며 "기본급에 재직자조건을 부가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 "적어도 고정급 형태의 정기상여금에 재직자조건을 부가해 이미 제공한 근로에 상응하는 부분까지도 (임금을) 지급하지 아니하는 것은 그 유효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번 판결은 대법원의 통상임금 판단 기준을 흔들었다는 평가다. 하급심이 대법원 법리에 도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금껏 4건의 주요 판결이 있었으며 그 중 3건은 서울고법에서 선고됐다.
서울고법은 지난 2018년 12월 선고된 '세아베스틸 통상임금 사건' 2심에서도 처음으로 대법원의 '재직 조건' 해석에 반기를 재직자 조건이 무효라고 판단했다. 이듬해에도 '기술보증기금 통상임금 사건'에서도 서울 고등법원은 잇따라 재직 조건이 무효라고 판단하면서 업계에 충격을 던졌다. 같은해 9월에도 산업안전보건공단 근로자들이 제기한 통상임금 소송에서 부산고법이 마찬가지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대법원은 이미 2020년에 세아베스틸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돌리면서 판례 변경 가능성을 열어 놓고 적극적인 법리 검토에 들어간 상황이다. 이에 경영계는 하급심 판결의 계속된 도전에 대법원이 입장을 바꿀 수 있다는 우려를나타내며 법원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기술보증기금 사건도 대법원에 올라가 있다.
국내 다수의 대기업들은 정기상여금에 재직 조건을 부착해 통상임금으로 인정되는 것을 기술적으로 막고 있다. 대법원 판단이 뒤집힐 경우, 안그래도 상여금의 비중이 높은 국내 대기업들이 부담해야 할 추가임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동시에 잇따른 소송전에 휘말릴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근로자들을 대리한 법무법인 중심의 류재율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2018년 세아베스틸 항소심 사건 판결에서 재직자 조건을 무효로 판단한 법리를 재확인 한 것"이라며 "이번 판결은 통상임금에 해당하는지의 여부는, 고정성의 존재 여부 보다는 그 급여의 성격이 기본급과 마찬가지로 소정근로의 대가인지 여부가 더 중요한 판단요소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직자 조건이 있다고 해도 일한 만큼 상여금을 지급하는 '일할 정산' 규정이 있는 경우에는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판단하면서 재직자 조건의 효력을 좁게 해석한 것이다. 대법원의 흐름이 고정성 요건 판단을 변경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법리 전쟁도 가열되고 있다.
재직조건을 유효로 보면서도 통상임금성을 인정한 하급심 판결도 등장한 바 있다. 서울고법은 2020년 12월 2일<i> </i>선고 판결에서 "재직조건이 있더라도 개인의 특수한 사정에 불과하다"며 정기상여금에 대해 소정근로의 대가성 및 고정성을 인정한 바 있다.
재직조건이 유효라고 보면서도 정기상여금의 연간 지급액이 월 기본급의 800%로 확정된 점, 연간 소정근로를 제공하기만 하면 추가조건의 성취 여부와 관계 없이 당연히 지급되는 임금인 점 등을 근거로 들며 통상임금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 판결의 재판부는 "재직조건은 ‘퇴직’과 같은 예외적인 상황에서 임금 정산의 편의를 위한 방안일 뿐"이라며 재직 조건이 부착된 상여금도 통상임금으로 인정했다.
하급심의 대법원 법리에 대한 도전은 이렇게 다방면으로 진행되고 있다. 물론 기본 대법원 판결과 결을 함께 하는 하급심 법원도 함께 쏟아지면서 하급심이 엇갈리는 모양새를 나타내고 있다.
김동욱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부 하급심 판결에서 다른 취지의 판결이 선고되고 있고, 그 중 상당수가 다시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며 "만일 대법원이 위와 같은 하급심 판결의 전향적인 해석을 받아들일 경우 다시 통상임금 소송이 줄이어 제기되는 등 경제에 엄청난 파급효과가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대법원이 추구해야 하는 최고의 가치는 법적 안정성이고, 그간 노사도 대법원 판결에 기초한 합의를 통해 임금체계를 변경해 왔다"며 "이런 상황에서 전원합의체 판결 선고 이후 10년도 경과되지 않는 시점에서 이를 뒤집는 것은 사회의 혼란만 야기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대기업의 임금 담당자는 "2013년 통상임금 판결 당시에도 고용부 해석을 대법원이 뒤집으면서 다수의 기업들이 큰 손실을 입었다"며 "대법원이 기존 자신의 판결마저도 뒤집을 경우 대법원을 신뢰했던 기업들은 예측하지 못한 임금 부담과 소송에 시달리며 제2의 통상임금 사태를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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