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히토 슈타이얼: 데이터의 바다’ 전시가 열린 서울 사간동 국립현대미술관. 평일 오전인데도 전시실은 관람객으로 북적였다. 낮 12시가 다가오자 셔츠 차림 직장인들이 가세했다. 한 관람객은 “지난 주말 전시를 봤는데 다시 보고 싶은 작품이 있어 점심시간에 짬을 냈다”고 했다.
유명 그림, 고미술이 전시됐을 때나 볼 수 있는 풍경이 미디어아트 전시회에서 재연됐다. 그것도 상영시간이 30분에 달하는 영상작품 위주란 점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지난달 29일 열린 ‘아티스트 토크’(작가가 작품을 설명하고 질문을 받는 행사)는 평일인데도 예매 시작 직후 전석이 매진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슈타이얼의 전시가 인기를 끄는 비결은 뭘까. 먼저 ‘이름값’이다. 독일 베를린예술대에서 뉴미디어아트 교수로 재직 중인 슈타이얼은 영국 미술 전문지 아트리뷰가 선정하는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의 단골이다. 2017년에 1위에 오르는 등 여러 차례 ‘톱10’에 들었다.
《면세 미술》 등 저서도 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미술계 경험과 오스트리아 빈 미술아카데미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내공이 잘 녹아있다는 평가다. 그런 그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대형 전시를 열었으니, 예술을 좀 안다는 사람들이 모른 척할 수 없는 일이다.
“미디어아트 특유의 파격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재미있고 아름답다”는 관람객의 입소문도 전시회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데 한몫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지원을 받아 만든 24분짜리 신작 ‘야성적 충동’에는 스페인 시골 양치기들이 등장하는데, 영상미가 웬만한 영화에 떨어지지 않는다. 독일 영화 거장 빔 벤더스의 조감독으로 일한 경험 덕분이다. 박진감 넘치는 음악도 매력적이다.
영상들은 현실과 허구가 뒤섞인 부조리극의 형식을 띤다. 중구난방처럼 흐르는 이야기 속에 현대사회와 미술에 대한 비판을 담는 식으로 생각할 거리를 준다. 예를 들어 18분짜리 영상작품 ‘소셜 심’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살바토르 문디’를 놓고 황당한 사건이 끊임없이 벌어진다. 등장인물들의 바보 같은 행태를 통해 아무 의미 없는 잡동사니가 명작으로 둔갑한 뒤 탈세 수단이 되는 부조리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런 식이니 ‘나 예술가이니, 알아서 모시라’는 허세도 부리지 않는다. 작품도 권위의식과 거리가 멀다. 게임과 만화 등 여러 ‘하위 문화’의 요소들을 거침없이 사용하고(태양의 공장), “직업이 없으니 예술가가 되는 것”이라는 등 ‘블랙 유머’(야성적 충동)도 넘친다. 그런 파격이 역설적으로 예술성을 끌어올렸다.
작품에는 제각기 무거운 주제를 다룬 수많은 상징이 숨어 있다. 영상들의 러닝타임만 따져도 최소 4~5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갖고 있는 작품을 다 내놨는데, 이걸 어떻게 하루에 다 보겠어요. 그러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다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음에 드는 것만 보고 즐기면 됩니다.” 전시는 9월 18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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