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이 몰아낸 필리핀 독재자 일가, 36년 만에 대통령궁 들어선다

입력 2022-05-09 14:58   수정 2022-06-07 00:02


필리핀에서 21년간 장기집권한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마르코스 주니어 전 상원의원(65·사진)이 9일(현지시간)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이 유력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과거 아버지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철권통치와 거리가 먼 젊은 유권자 층을 공략해 표심을 끌어모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이날 오전 6시에 시작된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장 개장 전부터 유권자들이 줄지어 기다렸다. 투표는 저녁 7시에 마감되며 비공식적으로 몇시간 안에 승자가 가려질 예정이다. 필리필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는 “투표율이 오전부터 고무적인 수준이다”라고 밝혔다.

이날 선거에선 대통령과 부통령을 비롯해 상원의원 13명과 하원의원 300명을 함께 선출한다. 지방 정부 공직자 1만 8000명도 뽑는다.

여론조사에선 마르코스 주니어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낙승할 거로 관측됐다. 선거 직전 마지막 여론조사에 따르면 마르코스 주니어 후보는 56%의 지지율을 얻었다. 2위 후보인 레니 로브레도 현 부통령(57) 지지율 23%를 30%포인트차로 앞섰다. 이변이 없다면 마르코스 주니어 후보가 대통령으로 낙점될 전망이다.

마르코스 후보가 당선되면 36년 전 민중봉기(피플파워)로 축출된 마르코스 일가가 정치적으로 부활하게 된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집권내내 반대파를 고문하는 등 인권유린으로 악명 높았다. 약 100억 달러(약 12조원)를 부정 축재했다는 불명예도 떠앉았다. 마르코스 일가는 1986년 필리핀의 민중 봉기에 밀려 대통령 관저를 탈출했다. 당시 28세였던 마르코스 주니어도 가족과 함께 하와이로 떠났다.

마르코스 주니어 후보는 1991년 귀국하며 정계에 복귀했다. 마르코스 가문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루손섬 북서부의 일로코스노르테에서 하원의원을 거쳐 주지사와 상원의원을 지냈다. 로드리로 두테르테 현 대통령과도 긴밀하게 엮여 있다. 2016년 두테르테 대통령이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국립묘지 안장을 허용하며 정치적 동반자가 됐다. 그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장녀인 사라 두테르테를 이번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임명했다.

마르코스 주니어 후보는 유세하는 동안 아버지의 유산을 적극 이용했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에 대한 중년층의 향수를 자극한 것이다. 아버지를 필리핀 경제 부흥기를 이끌었던 영웅으로 미화했다. 그는 유세 내내 아버지에 대해 “천재 정치인이자 최고의 정치가였다”고 강조했다.

그는 SNS를 활용해 독재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를 공략했다. 마르코스 주니어 후보는 선거 내내 대선후보 토론에 불참했다. 일가의 부정 축재와 탈세 의혹에 대해서도 반응이 없었다. 대신 전기요금 인하 등 포퓰리즘 정책을 제안하고 인터넷, 도로 등 인프라 개발을 공약을 밀어붙이며 추진력있는 정치인으로 탈바꿈했다.

마르코스 주니어 후보가 인기를 끈 배경에 필리핀의 고질병이 드러난다는 지적도 나온다.세습 정치의 폐해를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과거 필리핀을 지배했던 스페인과 미국은 소수에게 투표권을 주며 양극화를 조장했다. 1946년 독립 후에도 악습을 청산하지 못해 일부 재벌과 그 후손이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실제 지방 관료의 80% 국회의원의 약 67%가 필리핀 내 유력 가문 출신으로 이뤄졌다고 파이낸셜타임즈(FT)는 지적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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