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1세 집권 초반 영국은 가난이 보편인 나라였다. 인민은 밥을 굶어도 왕실은 좀 사는 게 보통이다. 영국은 왕실까지 가난했다. 국왕에게는 변변한 상비군도 없었고 귀족들은 툭하면 허약한 왕에게 반역이라는 이름의 시비를 걸었다. 엘리자베스는 근검절약을 국정 운영의 슬로건으로 내걸었고 악착같이 돈을 벌어들였다. 가난이 풍족한 나라에 돈 벌 거리가 마땅할 리 없다. 엘리자베스에게 영감을 준 것은 당대의 세계제국 에스파냐였다. 남아메리카를 정복하고 금과 은을 캐서 국부의 원천으로 삼았던 에스파냐는 유럽 모든 왕실의 로망이었다. 합리적인 엘리자베스는 가서 정복하고 지배하고 캐는 공정을 답습하는 대신 절차를 대폭 생략해 남미에서 오는 에스파냐 배를 털기로 한다. 이때 등장한 게 드레이크로 그가 첫 출정에서 약탈한 금은보화는 60만파운드에 달했다. 이 중 절반은 여왕의 몫. 영국의 한 해 국가 예산이 20만파운드였으니 더하라고 후원하지 않았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털리고 가만히 있을 에스파냐가 아니다. 당시 에스파냐 국왕은 현재 필리핀이라는 국명으로 역사에 영원히 이름이 남은 펠리페 2세였다. 그는 해적의 참수를 요구했지만 엘리자베스는 드레이크에게 귀족 작위를 달아주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한다. 결국 전쟁이 터졌고 칼레에서 무적함대가 침몰하는 것으로 에스파냐의 독보적인 제해권에 금이 간다. 그리고 영국은 세계제국의 지위에 한 걸음 더 다가간다.
대외 경쟁력을 높인 영국은 내실 다지기에 들어간다. 17세기 말까지 영국은 징세권을 팔았다. 행정조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으나 부작용은 심각했다. 징세 청부인은 구입한 액수 이상을 뽑아야 했기에 강도가 따로 없었다. 1688년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영국은 징세 청부 제도를 폐지하고 세금 전문 관료를 선발한다. 정부는 세무 관료들이 지역 유지들과 이익을 거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근무지를 자주 변경했고 이 시스템은 향후 세계 세무 관료의 모델이 된다. 여기서 끝? 영국은 세금 액수를 계산한 최초의 국가다. 국민의 소득을 계산했고 조세 부담 가능 액수를 산출했다. 이전까지는 되는 대로 세금을 부과했다. 난로세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각 가정의 난로 하나당 2실링이었는데 현재 가치로 500달러 정도다. 액수도 만만치 않았지만 사생활에 예민한 영국 국민은 징수원이 흙발로 집안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에 모욕감을 느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징수원이 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해서 고안한 게 밖에서 점검이 가능한 창문세였다. 이 두 세금에는 부자와 빈자에 대한 구분이 없다. 가난한 가정이라고 난로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며 부자라고 난로가 집 안에 수십 개 있을 이유도 없다. 이런 폐단이 없어지고 빈자에 대한 배려가 제도화되면서 영국의 내치가 안정된다. 조세혁명이자 재정혁명이었고 다른 나라들이 재무관리 실패로 줄줄이 파산하는 동안 영국이 버티고 성장한 이유다. 조세혁명 당시 영국이 선보인 것이 소위 ‘거위 털을 고통 없이 뽑는’ 스킬이었다. 이 스킬은 나중에 ‘원천징수’라는 획기적인 발상으로 완성된다. 거위가 아메바도 아니고 제 털 뽑히는 것을 모를 리 없다. 다만 알면서도 참아주는 것일 뿐이다. 지배계급은 종종 이 사실을 깜빡했다가 혁명으로 작살이 난다. 뺏기는 입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납세는 거위가 스스로 털을 뽑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제로 그런 나라가 있었다.
남정욱 작가·전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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