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美 공사관 통해 전파…1902년 인천서 첫 도시 대항전

입력 2022-05-12 16:57   수정 2022-05-13 02:30

테니스는 원래 맨손으로 하던 공놀이였다. 12세기부터 16세기까지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라 폼므(La Paume)’가 테니스의 기원이다. 귀족과 수도사들이 손바닥으로 공을 치고 받는 형태의 스포츠로 지금의 테니스와는 거리가 멀다. 털이나 천을 채워 둥글게 만든 공을 맨손이나 장갑을 끼고 손바닥으로 때렸는데, 코트 중앙의 경계선을 넘어 반대쪽 벽 어디든 손바닥으로 공을 쳐 넣으면 됐다. 상대방은 이 공을 직접, 또는 한 번 바운드된 공을 손바닥으로 다시 쳐서 넘겼다.

1360년께 영국인들은 이 경기를 영국으로 가져오며 공을 친다는 의미로 ‘테네즈(tennez)’라고 했다. 15세기 후반 라켓을 개발했고, 라켓의 등장으로 테니스가 대중화됐다. 1596년 프랑스 파리의 인구가 30만 명일 때 테니스 코트는 250개에 달했다. 19세기 영국 중산층의 여가 활동이던 테니스는 1877년 제1회 영국 선수권 대회가 윔블던에서 열리며 권위 있는 스포츠 대열에 올랐다.

한국에 테니스가 전파된 건 1884년 미국 공사관을 통해서다. 초대 주한 미국 공사 루셔스 하드우드 푸트가 공사관으로 사용할 한옥을 개조하며 잔디 테니스 구장을 만들었다. 1880년대 말 서울에 있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테니스 열풍이 불었다. 서울 정동 외국인 거주지 곳곳에 테니스 코트가 조성됐고, 여성들도 복식과 단체적 시합을 벌였다. 1888년 9월 서울유니온클럽이 결성되며 미 공사관 앞 공원 부지에 클럽하우스를 포함한 테니스 코트가 들어섰다.

서울 밖 테니스 열풍이 불었던 도시는 인천이다. 첫 도시 대항 테니스 대회는 1902년 가을 서울유니온클럽과 제물포클럽 간 대회였다. 개항장이던 제물포에 제물포클럽이 생기고, 테니스 코트가 들어서며 도시 친선 경기가 열렸다. 복식 4개 조, 단식 4개 조씩 여덟 경기를 치렀는데 첫 경기의 승자는 제물포클럽이었다. 경기 스코어는 6 대 2. 당시 “제물포는 테니스에 미쳤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테니스 열풍은 일본 식민지 시기 부드러운 공으로 치는 ‘일본식 정구’가 야구와 함께 보급되면서 주춤했다. 한국인이 주체가 된 진짜 테니스 열풍은 해방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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