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0년께 영국인들은 이 경기를 영국으로 가져오며 공을 친다는 의미로 ‘테네즈(tennez)’라고 했다. 15세기 후반 라켓을 개발했고, 라켓의 등장으로 테니스가 대중화됐다. 1596년 프랑스 파리의 인구가 30만 명일 때 테니스 코트는 250개에 달했다. 19세기 영국 중산층의 여가 활동이던 테니스는 1877년 제1회 영국 선수권 대회가 윔블던에서 열리며 권위 있는 스포츠 대열에 올랐다.
한국에 테니스가 전파된 건 1884년 미국 공사관을 통해서다. 초대 주한 미국 공사 루셔스 하드우드 푸트가 공사관으로 사용할 한옥을 개조하며 잔디 테니스 구장을 만들었다. 1880년대 말 서울에 있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테니스 열풍이 불었다. 서울 정동 외국인 거주지 곳곳에 테니스 코트가 조성됐고, 여성들도 복식과 단체적 시합을 벌였다. 1888년 9월 서울유니온클럽이 결성되며 미 공사관 앞 공원 부지에 클럽하우스를 포함한 테니스 코트가 들어섰다.
서울 밖 테니스 열풍이 불었던 도시는 인천이다. 첫 도시 대항 테니스 대회는 1902년 가을 서울유니온클럽과 제물포클럽 간 대회였다. 개항장이던 제물포에 제물포클럽이 생기고, 테니스 코트가 들어서며 도시 친선 경기가 열렸다. 복식 4개 조, 단식 4개 조씩 여덟 경기를 치렀는데 첫 경기의 승자는 제물포클럽이었다. 경기 스코어는 6 대 2. 당시 “제물포는 테니스에 미쳤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테니스 열풍은 일본 식민지 시기 부드러운 공으로 치는 ‘일본식 정구’가 야구와 함께 보급되면서 주춤했다. 한국인이 주체가 된 진짜 테니스 열풍은 해방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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